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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후배가 찾아와 소풍을 떠나듯 함께 길을 나섰다. 내가 사는 도시 원주에 있는 동학의 자취를 찾아! 먼저 찾아간 곳은 도시 외곽에 있는 송곡 마을. 작은 개울 옆 농로를 따라 걷다 보니, 황금빛 벼이삭이 고개를 숙인 논가에 대리석으로 세운 나지막한 비(碑)가 보였다. 비의 상단에는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라는 글귀가 박혀 있고, 하단에는 “천지는 부모요 부모는 천지니, 천지부모는 한 몸이라”는 명구가 새겨져 있었다.

동학의 제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을 기리는 피체비(被逮碑). ‘최보따리’는 해월(海月)이 최제우에 이어 도통을 이어받아 포교 활동에 힘쓰던 중, 조정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보따리 하나 달랑 메고 이 땅의 골짝골짝을 숨어 다니던 때의 모습을 딴 별칭이다. 밥 한 그릇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던 해월, 그리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바닥 인생들조차 한울님으로 공경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일생을 살아 온 해월은 바로 이곳 송곡 마을에서 은거하던 중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 피체비를 세운 이는 해월의 삶과 사상을 흠모하던 원주 출신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다. 이 비를 세운 몇 년 후 무위당 선생도 작고하셨지만, 손수 쓰신 글씨로 새겨진 비가 두 분의 아름다운 삶을 증언하고 있었다. 피체비를 세우던 날 무위당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 지구사회를 이끌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인내천(人乃天) 세계관의 한 모퉁이에 원주가 큰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방황하던 젊은 날 나는 무위당 선생을 뵈었다. 무위당 선생을 통해 동학의 깊은 뜻을 내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내가 선생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선생께서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다. 당시 나는 강릉 땅에 살 때였는데, 선생께서 입원해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문병을 갔다. 무척 수척한 모습의 선생은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찾아온 것이 뜻밖이었던 듯 놀란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했다. “사람들이 방사선 치료를 받으라고 성화구먼. 암도 내 몸인데 말이야!”

지금도 나는 ‘암도 내 몸인데!’란 말씀이 귓가에 쟁쟁하다. 암이라고 하면 모두가 대적해야 할 원수처럼 여기지 않던가. 문득 선생께서 건강하실 때 들려 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야!” 젊을 때는 이 말씀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듯하다. 우리 영혼의 위대한 스승들이 모두 ‘보듬어 안는 혁명가’들이 아니던가. 예컨대, 예수께서도 ‘태양은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게 햇빛을 비춰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잡초를 뜯어먹고 산다. 물론 잡초 가운데는 독성이 강해 먹을 수 없는 잡초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잡초도 거름으로 쓸 수는 있다. 오늘도 난 텃밭의 잡초를 베어 텃밭 한쪽에 수북이 쌓아 두었다. 거기에 오줌을 부어 썩혀 거름으로 만들 생각이다. 조물주는 세상에 필요가 없는 생명은 만들지 않으셨다.

해월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말씀을 남겼다. 나는 요즘 이 말씀이 사무친다. 잡초를 뜯어먹으면서 이 말씀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뜯어먹는 잡초도 나를 살리는 ‘하늘’이란 생각. 생명은 저 혼자 살 수 없다.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다른 생명을 먹고서야 생명을 영위할 수 있지 않던가.

해월 피체비를 떠나 다음 순례지인 무위당 기념관을 향해 발길을 돌리는데, 워낙 맑은 날씨라 멀리 있는 치악산 봉우리가 지척인 듯 선명하게 보였다. 무위당 선생은 살아생전 치악산을 모월산이라 불렀다. ‘어머니달님산.’ 이렇게 부른 깊은 뜻을 다 알진 못하지만, 세상에 어머니 산 아닌 산이 있을까.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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