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외국어 학습과 국어 사랑

입력
2018.10.08 11:03
수정
2018.10.08 18:25
25면

대학 졸업 후 30년 이상 영어를 사용하는 직업에 몸담아온 나로서는 영어를 접할 때마다 우리말과 한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케이팝(K-Pop)이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외국인들의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에 가슴 뭉클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우리는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한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지는 않은지, 국어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본다.

영어를 학습할 때마다 넘어야만 하는 장애물들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점이 발음이라는 것은 영어를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낄 것이다. 새로운 어휘를 배울 때마다 사전에서 발음기호를 찾아봐야만 하는 불편함은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낭패감으로 다가온다. 이에 비하면 거추장스러운 발음기호 없이도 쓰는 대로 소리 나는 한글을 가진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가. 세계 유수의 언어학자들이 모두 그 가치를 인정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한글이 언제부턴가 당연히 우리 곁에 있어 왔던 것처럼 평소 한글의 고마움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무심코 내뱉는 영어 표현들 그리고 거리에 난무하는 영어 간판들을 보게 되면 한글 홀대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한글 없이 스마트폰이나 카톡 문자를 보낸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앞이 깜깜할 것이다. 풀어쓰기 때문에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영어, 소리에 맞는 로마자를 먼저 입력한 다음 그 소리에 해당하는 한자를 모두 화면에 띄워서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느려 터진 중국어나 일본어의 입력 속도와 달리 초성, 중성 그리고 종성을 모아쓰는 음절 방식의 한글 표기 체계는 속도와 공간 축약이라는 효율성 면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환경에 최적화된 표기 수단이다. 570여 년 후에 다가올 디지털 시대를 미리 내다보고 만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세종대왕의 선견지명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국가 간 물리적 장벽이 급속도로 허물어지면서 영어의 영향력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정보화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영어를 배우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우리말과 한글,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영원히 한국을 떠나서 평생 외국에 살 것이 아니라면 국어 구사 능력, 특히 국어 쓰기와 어휘력은 외국어를 배움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산이 된다. 영어 학습에 앞서 국어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외국어, 특히 영어를 배우되 반드시 때와 장소를 가려서 사용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특히 방송 또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유명인들이 유식함과 남다름을 자랑하기라도 하듯이 무심코 영어나 한자를 섞어 사용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은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보기가 좋지 않다. 외국어를 배우더라도 무분별한 외국어 남용을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한글을 가진 국민으로서의 기본 도리다.

572돌 한글날을 기념하는 10월,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에 대한 고마움은 물론 한글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 깊이 새기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박규석 한국전문번역사협동조합 이사장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