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도망자 폴란스키

입력
2018.10.04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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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로만 폴란스키.

유명 감독 로만 폴란스키(85)는 도망자다. 1978년 미국을 떠난 후 40년 동안 미 사법당국의 추격을 받고 있다. 1977년 13세 미성년자에게 약을 먹이고 성행위를 했다는 게 죄목. 폴란스키는 미국에서 도망친 후 프랑스 시민으로 살며 유럽에서 영화를 연출하고 있다.

▦ 유대인인 폴란스키의 삶은 불우했다.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유대인을 절멸시키려던 나치의 광기가 지배하던 시공간에서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우슈비츠에서 숨졌다. 성인이 돼 미국에서 감독으로 명성을 쌓을 때도 비극을 겪었다. 1969년 임신 8개월이었던 배우 출신 아내 샤론 테이트가 악마를 숭배하는 집단에 의해 살해됐다. 배후에는 20세기 희대의 살인마로 불리는 찰스 맨슨이 있었다.

▦ 고통으로 벼려진 감수성 때문이었을까. 폴란스키는 아내가 숨진 후 더 정교한 연출력이 깃든 작품들을 내놓았다. ‘차이나타운’(1974)과 ‘테스’(1979)는 고전 반열에 올랐다. 2002년엔 ‘피아니스트’로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다. 지난해에는 ‘실화’로 칸영화제에 초대됐다. 최근에는 새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문제적 감독인 그가 고령에도 메가폰을 쥘 수 있는 건 빼어난 연출 감각 때문이다. 일부는 지독히도 불행했던 폴란스키의 개인사에 동정심을 표하기도 한다. 아무리 예술적 감수성이 넘치고 비극적 삶을 살았다 해도 폴란스키의 성범죄 혐의는 지워지지 않는다.

▦ 폴란스키의 신작은 ‘나는 고발한다’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비판하며 사법당국에 보낸 공개서한과 제목이 같다.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반유대주의 정서 때문에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드레퓌스의 삶을 그린다. 폴란스키의 연출 의도가 불순해 보인다. 드레퓌스를 빌려 자신이 40년 동안 마녀사냥을 당했다고 웅변하려는 듯해서다. 아니다 다를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선 비난이 들끓고 있다. 때마침 하비 와인스틴의 악행을 뉴욕타임스가 폭로한지 1년이 됐다. 폴란스키는 ‘미투’ 운동을 집단 히스테리라고 공박했다. 영화계 대가는 속죄로부터 도망치려는 비겁한 행동을 언제까지 계속할까. 한때 거장 호칭을 들었던 국내 몇몇 문화계 거물에게도 새삼 묻고 싶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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