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비핵화 문제의 당사자가 우리였다면...

입력
2018.10.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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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는 일정이 확정되었다. 일단 김 위원장과의 만남이 사전에 합의된 점만으로도 일정한 진전을 예상케 한다. 하지만 북미 간 신뢰수준을 보면 여전히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북한측 주요 인사들의 발언에 따르면 미국은 여전히 선비핵화만을 주장하면서 이를 강압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제재 압박 강도를 더 높이고 있으며, 종전선언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지난달 29일 유엔총회 기조연설 내용은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미국에 대한 신뢰 없이는 우리 국가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먼저 핵무장 해제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비핵화를 실현하는 우리 공화국 의지는 확고부동하지만, 이것은 미국이 우리로 하여금 충분한 신뢰감을 가지게 할 때만 실현 가능하다.” 특히 리 외무상은 미국내 보수세력들을 콕 찍어 이런 메시지들을 던졌다. “미국의 정치적 반대파들은 순수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구실로 우리 공화국을 믿을 수 없다는 험담을 일삼고 있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일방적 요구를 들고나갈 것을 행정부에 강박하여 대화와 협상이 순조롭게 진척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고 있다.”

리 외무상은 왜 유엔총회 연설에서 미국 내 특정 보수세력들을 겨냥해 작심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일까. 현재 트럼프 대통령과 보수세력과의 관계는 이전 클린턴 대통령(2001.1.20~2008.1.20)과 보수세력과 관계와 매우 흡사하다. 당시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들과 행정부 국방안보부서, 보수적 사회세력들이 제휴해 대북정책을 놓고 민주당 정권을 향해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클린턴 대통령은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워싱턴 정치권 내부의 집단이기주의와 권력투쟁이 정책의 신뢰성과 정합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강온파 논쟁에 대북정책을 맡겨놓는 바람에 대북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정도의 차이일 뿐 오바마 행정부(2009.1.20~2017.1.20)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국익보다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미국의 내부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듯하다. 북미관계의 주요 전환점마다 국내정치적 요인, 특히 미국 내 보수세력과 이와 연계된 극심한 관료정치, 그리고 의회의 태도와 요구가 북미간 합의 이행을 사실상 방해했다. 북한은 미국 내 이 같은 정치구조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는 별로 내키지 않는 반복적 경험의 산물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신뢰를 쌓는 방법을 리영호 외무상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그는 최근 남북관계에서 나타난 급속한 개선과 협력의 분위기는 신뢰조성이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 정상들이 5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무려 세 차례나 만나고, 회담을 통하여 남북간의 여러 문제들을 건설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필요한 신뢰를 쌓고 있으며, 그 결과가 실천을 통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지난 9월 19일 남북정상들이 공동발표한 역사적인 9월 평양공동선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올해 들어 남북간 정치, 군사, 인도주의, 체육문화, 경제협력을 포함한 많은 분야에서 대화가 활성화되고 화해와 협력의 기운이 높아졌고, 온 겨레와 국제사회의 지지와 환영을 받는 괄목할만한 결과물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만일 비핵화 문제의 당사자가 미국이 아니라 우리였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도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묘하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결국 앞으로 전개될 어떤 형식의 북미간 대화와 협상이든 빅딜 성사 여부는 양측 간 신뢰의 깊이와 질에 달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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