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교회에 보낸 편지, 실제론 이승훈 아니라 다산이 쓴 듯

입력
2018.10.04 04:40
28면
윤유일의 북경 파견 이야기가 담긴 ‘고려치명사략’의 한 대목. 중국 천주교회는 자생적인 조선 천주교회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고, 신앙의 어려움이 있을 때 조선 교회의 모범을 따르고자 요즘 말로 ‘순교사’에 해당하는 ‘치명사’ 기록을 남겼다.
윤유일의 북경 파견 이야기가 담긴 ‘고려치명사략’의 한 대목. 중국 천주교회는 자생적인 조선 천주교회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봤고, 신앙의 어려움이 있을 때 조선 교회의 모범을 따르고자 요즘 말로 ‘순교사’에 해당하는 ‘치명사’ 기록을 남겼다.

 ◇목 안의 가시 

구베아 주교의 8,000자에 달하는 사목교서 중 한 대목이 목 안의 가시처럼 조선 천주교인들의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행위와 제사에 대한 금지 명령이 그것이었다. 구베아 주교가 1797년 8월 15일에 사천(泗川) 대목구장인 생 마르탱(Jean Didier de Saint-Martinㆍ중국명 馮若望ㆍ1743~1801) 주교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 대목이 있다.

“조선 교회에서는 지난 1790년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여러 가지 의문과 질문 사항들을 보내왔는데, 그 중에는 조상들의 신주를 만들어 모셔도 되는지, 또한 이미 모시고 있던 조상들의 신주를 계속 모셔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는 베네딕도 교황의 칙서인 ‘엑스 궈(Ex Quo)’와 클레멘스 교황의 칙서인 ‘엑스 일라 디에(Ex illa die)’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 숭배로 규정한 칙서는 가톨릭의 해묵은 논쟁과 문제 제기, 그리고 이에 대한 오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 결정은 이전부터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의 보유론(補儒論)적 관점과 적응주의 원칙을 거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은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관점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은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의 교조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야기된 긴 논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필 이때 북경에서 프랑스 예수회 교단이 해체 축출되면서 프란치스코회 교단이 새로 자리 잡은 시점인 것이 화근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구베아 주교는 이승훈이 북경을 떠난 이듬해인 1785년에 북경에 부임했고, 예수회 출신 양동재 신부는 이미 광동으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선교권 쟁탈전은 전쟁에 가까웠다. 이 해묵은 선교권 전쟁의 와중에서 정작 새우등이 조선에서 터졌다.

 ◇청천벽력과 폭탄 선언 

윤유일은 1790년 10월 22일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기쁨도 잠시, 이제부터 조상 제사를 지낼 수 없다. 이 명령에 안 따르면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가히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신앙을 지키려면 패륜의 길을 가야 했다. 사목교서의 어조는 워낙 강경해서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선교사 파송 소식에 환호하던 조선 교회는 세부 항목을 검토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어찌할 것인가.

다산은 윤유일의 두 차례에 걸친 북경행에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윤유일이 북경으로 들고 간 편지는 이승훈의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28화에서 잠깐 언급했듯, 이승훈은 1801년 2월 18일 처형 당하기 열흘 전에 열린 의금부 공초에서, 1789년과 1790년에 북경에 보낸 편지가 사실은 정약용이 허락 없이 자신의 이름을 도용해 보낸 것이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이에 대한 다산의 반응은 기록에 없다. 심문관은 네가 쓴 내용이 분명한데, 어째서 정약용에게 떠미느냐고 준절하게 나무란 뒤 이 문제를 더 확대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다산의 입에서 이승훈은 우리 집안의 원수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처남 매부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치달았다. 이전 여러 차례 교난(敎難)의 고비마다 이승훈의 부적절한 처신과 언행이 누적된 결과였다.

다산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 썼다는 이승훈의 이 폭탄선언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이승훈은 1789년 당시 이미 교회 내부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28화에서 소개했듯, 교회를 벗어난 그를 다산이 찾아가 마음을 돌리려 애쓰기까지 했다.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 교회에 정돈된 입장을 보낼 때, 최초의 공인 신자인 이승훈의 이름을 쓰는 것은 당연했다. 훗날 황사영이 백서를 쓰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이전에 북경을 다녀온 황심 토마스의 이름을 빌려서 쓴 이유도 똑같다. 그쪽에서 아는 사람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글의 신뢰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고려치명사략’과 ‘고려주증’ 

여기서 잠시 1900년에 중국 천주교회에서 출간한 2종의 서책에 대해 소개해야겠다.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史略)’과 ‘고려주증(高麗主證)’이란 책이다. 중국 천주교회는 발생 초기부터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고려는 당시 중국에서 조선을 일컫는 호칭이다. 두 책 모두 조선 천주교회 순교사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한 해에 동시에 간행된 이 두 책은 모두 1874년 파리에서 2책으로 간행된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Histoire de L’ÉGLISE DE CORÉE)’에 기초하고 있다. 달레의 책이 간행되자 프랑스 신부들은 이 놀라운 조선 교회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중국 교인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고, 이것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샤를르 달레. 1874년 그는 '조선천주교회사'를 발간했다.
샤를르 달레. 1874년 그는 '조선천주교회사'를 발간했다.

중국인 신부 은정형(殷正衡)이 1900년에 중경(重慶)에서 달레의 책을 인명 별로 정리해 ‘고려주증’ 5권 2책을 펴냈다. 같은 해에 중국인 신부 심칙관(沈則寬)은 이와는 별도로 상해 자모당(慈母堂)에서 ‘고려치명사략’을 펴냈다. 지금부터 118년 전이다. 조선 천주교회의 치명사(致命史), 즉 순교사를 모두 23장에 나눠 정리했다. 심칙관 신부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이 1870년대 상해에서 ‘성심보(聖心報)’라는 이름의 천주교 월간 잡지 일을 보면서,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 사실에 대해 여러 차례 기고했다고 썼다. 이를 읽은 벗들이 간행을 권해 그는 이 책을 썼다. 당시의 ‘성심보’ 영인본을 구해볼 수 있다면 좀더 상세한 정황 파악이 가능할 듯하나, 필자의 공부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심칙관 신부의 형님은 심칙공(沈則恭) 신부였다. 그는 1871년 중국 상해 자모당에서 ‘관광일본(觀光日本)’ 2권 1책을 펴냈다. 내용은 일본 천주교회 순교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책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으로 천주교인이 되어 순교한 오따 줄리아 같은 조선인 순교자의 이야기도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심칙관 신부는 형님 신부가 정리한 300년 전 일본 천주교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조선인의 순교는 불과 30~40년 전의 일이고, 이중 김육품(金六品) 같은 사람은 자신들이 직접 만나 보았으며, 주문모 신부는 자기 고향 사람이기도 하니 이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고려치명사략의 표지
고려치명사략의 표지
고려주증의 표지
고려주증의 표지

1900년은 중국 대륙 전체에 의화단(義和團)의 난으로 불리는 광풍이 휘몰아치던 때였다. 당시 서태후는 서양인을 물리치려는 속셈으로, 의화단이 선교 시설을 불태우고 천주교 신부와 수만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방조 묵인했다. 이 광란의 폐허 위에서 중국 사제들은 신자들이 조선 교회의 모범을 따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더욱 굳건히 세우기를 바라,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 순교사를 펴냈다.

두 책은 성격이 사뭇 달랐다. ‘고려주증’은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를 인명 별로 정리해 순교자 사전처럼 묶었다. 다만 달레의 알파벳 표기로 유추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인명 표기가 오류투성이다. 반면 심칙관의 ‘고려치명사략’은 통사의 체계로 썼지만 달레의 책과 내용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고 인명 표기도 비교적 정확하다.

실제로 ‘고려치명사략’에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안 나오는 사실들이 더러 눈에 띈다. 권철신이 5형제였고, 권일신은 그 중 셋째라 권삼(權三)이라 부른 사실은 실제 족보 내용과 부합하나 달레의 책에는 없다. 또 김대건 신부 관련 내용에 등장하는 김육품(金六品)이란 인물의 존재도 다른 데서는 찾지 못했다. 이는 ‘고려치명사략’ 집필 과정에 달레의 책 외에 다른 소스를 활용됐다는 의미다. 기술 내용도 ‘고려주증’과 확실히 차이 난다. 중국뿐 아니라 국내에서조차 이 두 책에 대한 연구 논문이 단 한 편도 제출되어 있지 않은 것은 천만 뜻밖이다.

 ◇권일신 편지의 행방 

‘고려치명사략’ 제3장은 ‘고려 신자들이 스스로를 신부로 천거하다(高麗信人自擧司敎)’가 제목이다. 이에 따르면 1785년 이벽과 이승훈이 배교한 뒤에 권일신과 이존창 등이 모여 교회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교회의 제반 업무를 총괄하게 하기로 했다. 이에 권일신을 주교(主敎)로 삼고 이존창과 몇 사람의 교우를 신부로 삼아 이들 신부들이 각자 한 지역을 전담하여 영세와 견진 성사 등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행동이 큰 죄가 됨을 알게 된 뒤 권일신은 큰 의혹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이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가서 주교의 처소를 찾아가 권일신의 편지를 올렸다. 편지를 본 주교는 천주께 큰 감사를 올리고 권일신이 질문했던 물음에 대해 하나하나 답장을 해 주었다.

‘고려치명사략’에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와 달리, 이 대목 어디에도 이승훈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북경에 보낸 편지 또한 권일신이 발신자로 나온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와 1795년 주문모 신부의 공초 기록에도, 1790년 2차 북경 방문 당시 윤유일이 권일신과 이승훈의 편지 2통을 들고 왔다고 적혀 있다. 어쨌거나 권일신의 이름으로 된 편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현재 이 편지는 소재와 내용을 알 수 없다.

‘고려치명사략’으로 보아 당시 중국 교회는 윤유일을 특사로 보낸 주체를 이승훈이 아닌 권일신으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당시 이 서한은 조선 천주교회 집행부의 판단 아래 공식적으로 작성되었고, 설령 이승훈이 집필자로 이름을 올렸더라도 실제 쓴 사람은 그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크다. 이승훈이 실제 집필자를 다산으로 지목한 것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증언인 셈이다. 1788년 9월 다산이 이승훈을 찾아간 일이나, 그 후의 여러 정황에 비춰 북경으로 간 편지는 다산이 권일신의 지시에 따라 중의를 담아 썼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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