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필의 제5원소]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입력
2018.10.02 10:28
25면

몇 달 전 한 공중파 TV 프로그램에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지구 평면설을 검증한다는 취지에서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를 거부하는 과학자들 각 세 명씩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구 평면설에 따르면 지구는 둥근 공 모양이 아니고 납작한 원반 형태로 평평하다. 일부 사람들이 지구 평면설을 믿는 이유는 수평선이나 지평선이 곡면으로 휘어진 모습을 결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1957년 구 소련이 스푸트닉 호를 발사한 이래 지금까지 인류가 쏘아 올린 그 많은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은 모두 조작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진실을 숨기기 위해 NASA 이름으로 나가는 모든 사진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누구나 옳다고 믿는 사실에 의심을 품고 끝까지 검증해보려는 자세는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다. 그런 의심과 검증은 과학을 발전시킨 원동력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지식이나 상식과 충돌하는 의견을 낼 때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 확립된 사실들과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의심하는 만큼의 호기심으로 자기 자신들의 주장을 의심해 보지는 않은 것 같다.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분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왔다니까 주변에서는 아직도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지구 평면설 말고도 ‘아직도 그걸 믿는’ 재야과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을 나는 이메일이나 우편물을 통해 요즘도 드물지 않게 접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국내 뉴스통신사에서 무한동력 영구기관을 발명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지구 평면설도 그런 주장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나마 지구 평면설이나 영구기관은 상식 수준에서 그 진위를 판별할 수 있지만 관련된 과학기술의 내용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보통 사람들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과학적인 연구대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은 어떨까? 누군가에게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거짓과 오류로 점철된 조작으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지난 9월18일부터 3일 동안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TV 화면에 비친 평양 시내와 능라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평양 시민들, 백두산 천지에 나란히 선 남북한 두 정상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지금까지 또 다른 지구 평면설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북한은 붕괴직전의 상황도 아니었고 인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형편도 아니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는 15만 명의 평양시민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마이크를 쥐어줄 만큼이나 확고했다. 정상회담 합의문을 담은 평양선언은 핵과 전쟁의 위협이 없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한 남북한의 실질적인 조치들이 곧 실행됨을 예고했다. 나는 평소 한국 사람들의 평균보다는 조금 더 북한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겼으나, 나 역시 ‘북한 평면설’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겠다. 북한이 백두산 천지를 중국에 팔아먹었다는 낭설이 가짜뉴스였음을 다시 확인한 것은 일종의 보너스랄까.

나보다 훨씬 더 ‘북한 평면설’에 빠진 분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육성으로 비핵화를 말한 적이 없다며 지금까지 남북미 3국 정부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분들은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 비핵화’가 나오자 이제는 군사적인 긴장완화 조치들을 두고 서해북방한계선을 내줬다거나 일방적으로 무장해제를 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분들은 우주정거장에 올라가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

‘북한 평면설’이 허망한 만큼이나 북한 핵문제에서 미국의 나태함과 일방주의 또한 새삼 눈에 밟힌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중간선거 지원유세에서 자신은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거판에서 나온 말이니 적당히 가려서 들어야겠지만 트럼프의 이 말은 지금 북미협상이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한 이유의 단면을 슬쩍 보여주고 있다. 북한이 납치자를 석방하고 미군유해를 송환하고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을 동결하고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기하고 미사일 엔진 시험장 해체에 들어가는 동안 미국이 한 일은 한미연합 군사훈련 유예와 북미정상회담뿐이었다. 트럼프가 진실을 고백한 셈이다. 미국은 지난 6월 새로운 북미관계를 수립한다는 싱가포르 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웠지만, 추석 차례상을 차릴 때 조율이시니 홍동백서니 하는 규칙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나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TV를 통해서나마 평양의 실제 모습을 본 것은 며칠 전이 처음이었다. 아직도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이 있냐는 물음이 그래서 내게는 여전히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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