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버노 청문회’ 두 쪽 난 미국

입력
2018.09.28 17:15
수정
2018.09.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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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렛 캐버노(왼쪽)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인준 청문회에 출석한 캐버노와 그를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한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 팰로앨토대 교수.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브렛 캐버노(왼쪽)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인준 청문회에 출석한 캐버노와 그를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한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 팰로앨토대 교수.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미 상원 법사위에서 열린 브렛 캐버노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청문회에 그의 성폭력 고발자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 팰로앨토대 심리학과 교수가 출석해 피해 경험을 증언하자 미국 여론은 양분됐다. 민주당 측은 포드의 ‘자기 희생적’ 증언을 높게 평가하고 옹호하며 캐버노의 인준 표결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주류는 이번 사건을 민주당의 정치 공세로 몰아 붙이며 캐버노를 감쌌다.

 ◇‘미투 운동’ 주창자 참관 등 미 전역 숨죽이며 지켜봐 


미국 전역은 이날 의회 상황을 방송하는 케이블 채널 C-SPAN을 통해 캐버노의 청문회에 나선 포드의 증언을 숨 죽이며 지켜봤다. 포드가 “나는 이 자리에 오기를 원하지 않았고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시민적 의무’에 따라 증언을 결심했다”고 발언하자 진보 성향 언론은 특히 박수를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어두운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증언하는 포드의 행동을 ‘희생’으로 표현했다.

특히 지난해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운동의 폭발에 기여한 여성들은 포드의 편에 섰다. ‘미투’란 표현을 처음으로 제안한 운동가 터라나 버크와 이를 대중에게 알린 배우 앨리사 밀라노는 청문회에 초청돼 포드의 증언을 경청했다. 잡지 뉴요커는 “흔들리는 포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성들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고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다”고 전했다. 공화당에서 “왜 지금 증언하느냐”며 포드의 배후에 민주당이 있다는 공세를 펼치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이용자들은 ‘내가 고발하지 않은 이유(#WhyIDidntReport)’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미투 운동이 확산돼서야 공개 증언에 나설 수 있다고 변호하기도 했다.

브렛 캐버노의 연방대법관 임명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27일 워싱턴에서 피켓을 든 채 빗속을 행진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브렛 캐버노의 연방대법관 임명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27일 워싱턴에서 피켓을 든 채 빗속을 행진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보스턴 시민들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27일 브렛 캐버노의 청문회를 다루는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보스턴=로이터 연합뉴스
보스턴 시민들이 점심 식사를 하면서 27일 브렛 캐버노의 청문회를 다루는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보스턴=로이터 연합뉴스

 ◇민주당 FBI 조사 압박 vs 공화당 성범죄 수사관이 변호 

여론을 등에 업은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청문회에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캘리포니아)은 청문회 시작과 함께 1991년 애니타 힐이 당시 청문회에 나선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을 했지만 공화당에 무시당한 사실을 언급하며 상황이 그 때와 바뀌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카멀라 해리스 상의원(캘리포니아)은 “백악관에 연방수사국(FBI) 조사를 요청하겠느냐”고 캐버노를 몰아붙였다. 강도 높은 추궁이 이어졌으나, 캐버노는 답변을 회피했다.

반대로 상원 법사위를 모두 남성으로 채운 공화당은 ‘남성이 포드를 추궁하는’ 그림이 낳을 정치적 역풍을 우려해 의원들 대신 성범죄 전문 수사관 레이철 미첼을 내세웠다. 미첼은 포드에게 증언의 진실성을 가리기 위한 질문을 던졌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미국 언론은 미첼의 몇몇 질문이 오히려 포드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을 돕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보수 성향 언론인 폭스뉴스의 진행자 크리스 월러스도 “포드의 증언을 듣고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라며 이를 “공화당에 재앙”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는 캐버노의 인준을 밀어붙이기 위해 청문회 다음날인 28일 오전 표결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27일 청문회에서 공화당 측 성범죄 전문 조사관인 레이철 미첼이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의 증언을 듣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27일 청문회에서 공화당 측 성범죄 전문 조사관인 레이철 미첼이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의 증언을 듣고 있다. 워싱턴=EPA 연합뉴스

 ◇캐버노, 청문회를 ‘서커스’로 성토하는 등 신경질적 반응 


캐버노는 이날 청문회를 ‘서커스’ ‘좌파의 조직된 공격’이라고 성토했다. 그는 “이렇게 기괴하고 조직적인 인격 말살은 국가에 봉사하려는 모든 좋은 이들의 의지를 꺾을 것”이라며, “당신들이 최종 투표에서 나를 꺾을지언정 내가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사퇴 불가 입장을 피력했다. 에이미 클로버샤 민주당 의원(미네소타)이 “(성폭행을 하던 순간) 술을 마셔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나는 그러지 않는데, 당신은 그러느냐”라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가 뒤늦게 사과하기도 했다.

이에 공화당 중진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청문회장에서 “(이 청문회는) 내가 정치에서 본 것 중 가장 비도덕적인 사기극”이라며 캐버노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자신의 트위터로 캐버노를 응원하며 상원에 인준을 촉구했다. 그는 “캐버노의 증언은 강하고 진실성 있었으며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며 “인준을 연기하고 방해하려는 민주당의 사기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CNN방송이 인용한 백악관 관계자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캐버노의 강경한 태도에 큰 만족감을 보였다. 미국 언론은 캐버노가 포드의 증언을 강하게 부정하며 때로 감정적인 모습까지 보인 것이 흔들리던 공화당의 지지를 붙잡았다고 평가했다.

27일 청문회에 출석한 브렛 캐버노가 증언 도중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27일 청문회에 출석한 브렛 캐버노가 증언 도중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중간선거 불리한 공화당, 캐버노 인준 밀어붙여 

포드 교수의 증언이 전국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공화당과 보수 진영이 그를 옹호하는 이유는 캐버노의 인준 문제가 11월 중간선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보수 입장에서는 7월 은퇴한 중도 성향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의 공백을 캐버노가 메우면 연방대법원을 보수 우위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11월 중간선거에서 상ㆍ하원을 수성해야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등으로 불리한 공화당은 중간 선거에서 패한다면 캐버노가 아니라 다른 후보를 세우더라도 민주당의 반발로 인준이 어려워질 수 있다. 보수 성향 일간지인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브렛 캐버노를 인준하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며 “민주당의 진짜 목적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내 연방대법원의 4대4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공화당은 포드의 증언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캐버노를 칭찬하고 민주당이 성폭력 문제 제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몰아붙이는 전략을 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포드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캐버노의 칭찬에 집중한 것도 이런 계산 때문으로 보인다. 존 코닌 의원(텍사스)은 “포드의 증언에 신뢰성이 없다고 볼 이유가 없다”라면서도 “이제는 투표를 할 시간”이라며 캐버노의 인준을 낙관했다.

공화당 내에서 반트럼프 중립파로 분류되는 제프 플레이크 상원의원이 27일 청문회에서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의 증언을 듣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공화당 내에서 반트럼프 중립파로 분류되는 제프 플레이크 상원의원이 27일 청문회에서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의 증언을 듣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반 트럼프 성향 중립파 공화당 의원 선택이 관건 

상원 법사위의 인준 제청 여부가 상원 전체 투표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캐버노가 법사위 문턱을 넘더라도 공화당이 상원의 최종 표결 이전에 반(反)트럼프 성향 중립파 의원을 설득할 수 있을지가 인준의 관건이라고 보고 있다. 밥 코커 의원(테네시)이 캐버노 지지에 힘을 보탰지만, 법사위 소속인 제프 플레이크 의원(애리조나)을 비롯해 수전 콜린스(메인) 리사 머카우스키(알래스카) 등 다른 중립파 의원은 공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들과 민주당 중립파인 조 맨친 의원(웨스트버지니아)이 청문회 후 회동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또 래리 호건(메릴랜드) 찰리 베이커(매사추세츠) 존 케이식(오하이오) 필 스콧(버몬트) 등 공화당 소속 주지사도 포드를 비롯한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주장을 조사한 후 인준을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들 주는 모두 중간선거에서 주지사 선거가 예정돼 있으며, 임기 제한인 케이식 지사와 달리 나머지 세 주지사는 선거에 나서야 하는 처지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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