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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스티브 잡스로 불렸던 엘리자베스 홈즈는 결국 실리콘밸리의 김선달이 되고 말았다. 홈즈는 2003년 스탠퍼드대 화학과를 중퇴하고 싱가포르 소재의 한 유전자 연구소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19세의 나이에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했다. 이 회사는 손가락 끝에서 채취한 피 한 방울로 260여개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의료검사기 에디슨을 개발했다고 홍보하며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혁신기업으로 떠올랐다. 기업 가치는 한때 90억달러까지 치솟는다.

스티브 잡스를 연상케 하는 거침없는 언변과 검은색 터틀넥, 외교 분야 공무원이었던 부모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접하며 쌓은 국제적 소양과 외국어 실력, 금발의 준수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또래 대학생들과 달리 연애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제3국 어린이들을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연구에 매진하며 창고에서 창업해 성공을 이룬 이공계 여성 CEO, 조지 슐츠,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 등 그의 멘토임을 자처했던 명사들. 홈즈는 시대가 원하는 인재상의 완벽한 조합이었고 방송과 언론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시장은 환호했고 투자는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기극은 오래가지 못했다. 테라노스가 미 식품의약국에서 인증받은 검사는 헤르페스 단 하나뿐이었으며, 테라노스를 경영하면서 전횡을 일삼던 최고운영책임자 발와니와는 연인 사이였음이 월스트리트저널의 폭로로 밝혀지면서 홈즈와 발와니는 각종 금융사기 혐의로 기소되는 신세가 되었고 남은 자산을 투자자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고 회사 문을 닫기에 이른다.

어떻게 이러한 사기극이 가능했을까. 제2의 스티브 잡스를 꿈꾸는 우수한 인재들과 투자자들이 몰려드는 벤처 창업의 성지, 실리콘밸리는 지속적으로 우수한 인재와 자금을 흡수하기 위해 흥미로운 이야기로 포장된 영웅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그리고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역경을 극복하고 창업에 성공한 영웅을 바라보며 창업을 꿈 꾸는 수많은 이들은 힘든 시간을 견뎌 낸다. 홈즈는 영웅에 목말라하는 실리콘밸리와 흥미 위주로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는 언론과 방송이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본질을 헤아리지 못하고 허상을 쫓다가 우리의 삶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었나. 예능 프로에서 연출된 정치인들의 소박하고 인자한 모습에 마음을 뺐겨 표를 주었다가 상처받은 적이 한두 번은 아닌 듯하다. 극심한 변화와 함께 속도가 경쟁력인 시대가 전개되면서, 우리의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은 더욱 거세게 우리의 삶을 지배해 갈 것이다. 장문보다는 단문에 익숙해져 가는 우리, 문자보다는 사진과 그림에 익숙해져 가는 우리는 선택적 지각을 통해 SNS에 남겨진 글 몇 줄과 사진 몇 장으로 쉽게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 현상을 지각한다.

물론 ‘신은 마음을 보고 사람은 겉모습을 본다’는 말처럼 누군가의 겉모습은 우리의 행동에 분명 영향을 미친다. 심리학자 빅밴의 실증연구도 이를 증명한다.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사람이 무단횡단을 했을 때 보다 말쑥한 신사복 차림의 사람이 무단횡단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따라 할 확률이 4배 높다고 한다. 또한 공중전화 부스에 동전을 두고 나온 후에 다음 순서의 사람이 통화를 마치고 나올 때, 두고 나온 동전을 본적이 있는지를 물어보면 말쑥한 신사복 차림의 사람에게 동전을 돌려줄 확률이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사람에게 동전을 돌려줄 확률보다 2배 높다고 한다.

누구든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지각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쏠림 현상으로 인해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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