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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 경기장 군중연설로 평양선언 신뢰 보강
역지사지로 트럼프 설득, 2차 북미회담 도출
“신뢰 바탕 비핵화 해법 못 찾으면 공멸”인식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3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국제사회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결단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며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2박 3일 남북 정상회담 일정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은 능라도 5ㆍ1 경기장에서 15만 평양 군중을 상대로 행한 7분간의 연설이다. 공연 내용을 크게 바꿨다지만, 대표적인 체제홍보 행사에 참석한 것 자체가 파격이었고, 연설 메시지도 가볍지 않았다. 더구나 그 군중들은 김씨 왕조의 세습을 용인하고 맹종하면서 남쪽을 미 제국주의의 괴뢰로 여기는 전사들 아닌가. 문 대통령은 자신을 주사파 종북세력의 하수인 정도로 매도하는 남쪽의 극우 보수세력에게 비난과 억측의 빌미를 주고, 자칫 중도우파의 의구심도 키울 수 있는 이 행사에 굳이 왜 참석한 걸까.

문 대통령은 귀환 보고회에서 답을 내놓았다. “그들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저의 연설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합의한 9ㆍ19 평양선언은 남북 지도자를 넘어 북한 주민의 동의를 얻은 확약이라는 것이다. 그의 생각은 뉴욕 한미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김 위원장이 직접 전 세계 언론 앞에서 비핵화 의지를 밝히고 내가 15만 평양시민 앞에서 김 위원장과 비핵화 합의를 다시 강조한 것은 핵 포기가 북한 내부에서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식화됐다는 뜻이다”. 이른바 ‘신용 보강’이다. 미국 내에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는 여론이 많으니 주민들에게 공표해 추인받는 별도의 이벤트를 벌였다는 얘기도 된다.

메시지 수위에 고심한 흔적도 역력하나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뉜다. “우수하고 강인한 8000만 우리 민족이 더 이상 전쟁 없는 평화의 땅에서 함께 살기 위해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비핵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는 등의 대목은 큰 울림을 줬다. 반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거듭 확인하고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다”거나 “나와 함께 담대한 여정을 결단한 김 위원장”이라고 칭송한 대목은 우리끼리라는 인상을 주고 북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 같아 낯설었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이런 장면과 문-김의 남다른 ‘브로맨스’가 미국 언론에 곱게만 비치진 않은 것 같다. "문 대통령이 ‘핵 무도회’(nuclear dance)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가 됐고 '미국의 동맹'보다 '핵심 중재자'에 좀 더 큰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NYT의 분석은 한 예다.

문 대통령의 한 손에 쥔 카드가 신용보강이었다면 다른 손에 쥔 패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앞세운 설득이다. 방북 전 북미대화가 벽에 부닥친 이유를 불신으로 요약하고 ‘역지사지의 자세’를 강조한 그는 방미를 앞두고도 “미국이 북한 입장을 역지사지해가면서 대화를 조기에 재개할 것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평양 공동선언에서 사용한 참관이나 영구적 폐기라는 용어는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 폐기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설명도 했다. 미국 입장을 생각해 북한이 양보했으니, 미국도 북한 입장을 배려해 종전선언 등 상응 조치를 내놔야 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직후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공식화하고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미 대화의 목적을 “전쟁의 망령을 대담하고 새로운 평화의 추구로 대체하기 위해”라고 공언했다. 이에 맞춰 문 대통령은 북한을 믿지 않는 미국 내 주류 엘리트를 향해 “(가역적인) 종전선언으로 손해 볼 것 없다”며 김 위원장과 흉금을 터놓고 나눈 말도 공개했다. 화룡점정은 북 비핵화의 중재자ㆍ촉진자를 넘어 ‘보증인’을 자처하며 국제사회의 화답을 촉구한 유엔총회 연설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김 위원장은 섣불리 훈수할 수 없는 ‘불가역적 상황’에 처했다. 세 사람도 이미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자각한 듯 서로 치켜세우기 바쁘다. 패키지 딜이든 뭐든, 답을 찾지 못하면 공멸할 수밖에 없는 이 지구적 게임의 끝은 어딜까. 힌트는 역지사지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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