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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세종대에 확인된 양국 격차의 생성·확대 배경의 하나로 낮은 농업생산성을 고려한다. 농업은 자연친화적이고 노동의 대가로 수확을 얻는 점이 유학의 가르침에 부합하고 종사자의 정주(定住)성이 높아 상공업보다 중시된다. 그러나 수차·수레의 활용이 저조해 생산성은 중국과 일본보다 낮다.

“...농기구를 편리하게 이용하는 점에선...복희씨나 신농씨 시대 이전과 다름없으니...시경에 나오는 창고나 풀베는 기구가...지금보다 나았을 것...수차는 가뭄에 대비하는 것이고 수레는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지금까지 이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해...”

1798년 11월 30일 정조가 충의위 배의 등 27명의 소를 접하고 한 말이다. 수차ㆍ수레의 보급에 열정을 지닌 그는 ‘널리 보급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백성의 눈높이에 맞는 제안으로 보아 승낙하지만 재위 중 농사 일선에서 이들 장비가 제대로 쓰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왕명과 조정의 결정 사항이더라도 일선에서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사례가 있다. 비용 부담이 크거나 관원의 규율 이완으로 일선 지방행정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다. 평지에서의 수레 사용을 권장하자는 인조대 경기도 관찰사 심열, 숙종대 우찬성 윤휴와 호조판서 이유, 정조대 대사헌 홍양호, 장령 정의조의 소가 그러한 예로 실격의 역사 장면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일부 문헌은 영조대부터 저수지가 다수 확보되어 모내기가 확대되고 농업 생산력이 늘었다고 적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저수지 개설이 수로의 정비, 수차ㆍ수레의 보급과 함께 이뤄져야 모내기 확대 등 산출 증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과장된 듯한 정조의 탄식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노동력 투입 외에 토지의 질 개선, 수차 같은 농기구 투입, 모내기 등의 기술 제고가 필요한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개탄한 것일 수 있다.

일본에선 중국 못지않게 수차ㆍ수레가 보급되어 생산성이 높고 물류비용도 적게 든다. 조선보다 산지가 많지만 농로는 물론이고 지역을 잇는 주요 가도가 일찍 정비되기 때문이다. 군사 이동 외 상업 활동과 절, 신사 참배 등 순례 목적의 내륙 가도 이용자가 많아 도로가 조기에 개설되고 수레도 널리 활용된다.

모내기가 8세기 나라시대 이후 확대된 배경에는 국토가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우리보다 가뭄 피해가 덜하다는 차이가 있다. 시코쿠 북동부 등 상습 가뭄 지역에선 일찍부터 저수지를 만들어 대비한다. 그래서인지 일본 정부가 모내기 금지법제를 시행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반면 조선에선 태종대인 1414년 6월의 ‘모내기 금지령’ 이후 300년이 지난 숙종대 1704년 8월, 조정에서 관개지 외 지역의 모내기 금지가 논의될 만큼 저수지 등 기반시설의 미비 상태가 지속된다.

이상의 정황은 조선의 농업생산성이 일본보다 낮을 것임을 시사한다. 추산해보면 1700년경의 1인당 쌀생산량은 조선이 0.44석으로 일본 0.60석의 73% 수준이다. 양국 모두 1인 연소비량인 1석(=180리터, 144kg)에 미달하며 부족분은 보리ㆍ밀ㆍ콩ㆍ조ㆍ피 등으로 보충된다. 추산에 쓴 인구ㆍ논면적ㆍ쌀생산 통계는 조선이 1380만명ㆍ60.4만결ㆍ604만석, 일본은 2829만명ㆍ169.2만결ㆍ1692만석이다. 약 3,000평의 1결에서 10석의 쌀 생산을 가정한다. 유의할 점은 사용 통계나 가정이 달라지면 추산치가 꽤 차이날 수 있으며, 시대와 나라에 따라 생산성과 도량형 기준이 달라 사용 통계의 객관적 입증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덧붙여 추산치가 엄격한 농업생산성 지표가 아닌 점도 한계다.

정리하면 조선에선 통신사 박서생이 앞선 일본을 배우자며 세종에게 건의한 수차 보급 확대를 통한 생산성 제고의 건이 370년 후인 정조대까지 과제로 남는다. 배경에는 저수지와 수로의 개설, 정비가 제때 이뤄지지 못하고 농지 현장의 실정에 맞는 수차를 만들어 보급하지 못한 점들이 있다. 19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양국간 생산성 격차가 더 커져 국력 격차로 발전하고 이는 자본 축적의 저해와 재정 사정 악화로 이어진다. 조정이 산업화는 물론 국비 유학생과 연수생의 해외 파견 등 인재 양성에 나서지 못하고, 철도 등 기간 시설의 건설을 외국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면서 조선 말기 역사의 품격이 크게 떨어진다.

이후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산계획에 따른 수리시설 정비와 농지ㆍ농사의 개량으로 생산성 격차가 꽤 줄어든다. 90년이 더 지난 지금, 양국의 농업생산성은 역전되었다. 2013년 기준 쌀 60kg의 생산비는 우리 측이 8.6만원으로 일본 측 15.2만원의 57% 수준이다. 배경엔 1990년 제정된 농어촌개발특별조치법에 따른 위탁영농 확대 등의 개혁 조치가 있다. 농업회사법인과 영농조합법인이 신설되어 개인 농가의 농기계 보유와 투하노동시간이 줄고 영농에 ‘규모의 경제’가 실현된다. 변화의 시점(時點)과 속도에서 일본보다 앞선 것이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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