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서 받아온 '선교사 파송' 약속... 조선 교회가 기쁨에 술렁

입력
2018.09.27 04:40
28면
윤유일 초상화. 조선교회가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파견한 그는 중대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북경에서 받아온 성작.
윤유일 초상화. 조선교회가 사신단을 따라 북경에 파견한 그는 중대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북경에서 받아온 성작.

 ◇뜻밖의 손님 

1789년 12월 16일(음력), 세밑의 북경 거리는 영 부산스러웠다. 오후 들어 낯선 행색의 젊은이가 북경의 천주당 앞에 나타났다. 용건을 묻는 청지기에서 그는 종이를 꺼내 양동재(楊棟材) 신부를 만나게 해달라고 썼다. 청지기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사제관으로 들어갔다. 메모를 전해 받은 로(Nicolas-Joseph Rauxㆍ중국명 나광상(羅廣祥)ㆍ1754-1801) 신부의 지시에 따라 청지기가 손님을 안내했다.

쭈뼛쭈뼛 들어온 청년은 붓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조선에서 온 윤유일(尹有一)입니다. 양동재 신부님을 뵙고, 조선 교회의 상황과 저희의 청원을 말씀 드리려고 왔습니다.”

조선 교회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로 신부는 이 말에 크게 놀랐다. 양동재 신부는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랑몽(Jean-Joseph de Grammontㆍ1736-1812?) 신부의 중국 이름이었다.

“그분은 몇 해 전 이미 광동(廣東)으로 떠나셨소. 지금은 내가 이곳의 책임을 맡고 있지요. 나는 나(羅) 신부입니다.”

이후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필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알게 된 젊은이의 인적 사항은 이러했다. 나이는 29세, 여주(驪州) 사람으로 권일신의 제자였고, 이승훈에게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조선 교회 내부에서 제기된 교리 상의 문제와 가성직 제도 아래 신부의 역할과 월권 및 제반 교리 및 교무 수행에 대한 중국 성직자의 권위 있는 답변을 원했다. 조선 교회의 위임을 받아 20냥의 은자를 뇌물로 주고 동지사(冬至使) 사신 행차에 마부 자리를 얻어서 왔고,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이곳부터 찾았다고 했다.

그가 갑자기 입고 있던 겉옷을 벗더니 옷의 솔기를 뜯기 시작했다. 작게 잘려진 천 조각들이 그 안에서 계속 나왔다. 제일 안쪽에서 잘 접은 명주천 몇 장을 꺼낸 청년은 그것을 로 신부에게 공손하게 건넸다. 승두문자(蠅頭文字)! 말 그대로 파리 대가리만한 깨알 같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811년 조선 천주교회가 교황에게 보낸 명주천에 쓴 편지. 윤유일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승두문자, 파리 머리 만한 작은 크기의 글자를 빼곡하게 채워 넣은 실물을 상상해볼 수 있다.
1811년 조선 천주교회가 교황에게 보낸 명주천에 쓴 편지. 윤유일 당시의 것은 아니지만 승두문자, 파리 머리 만한 작은 크기의 글자를 빼곡하게 채워 넣은 실물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자못 놀라웠다. 1784년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보낸 편지였다. 그간의 전교 활동으로 조선에 1,000명이 넘는 신자가 입교했으며, 그 중 남자 12명과 여자 12명을 회장으로 임명해서 지역별로 역할을 분담해 교우들을 관리하고 포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북경 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떠난 한 사람의 조선인에 의해 선교사가 파송된 적이 없는 조선 땅에 6년 만에 1,000명의 신자가 생겨났다니, 로 신부는 어안이 벙벙했다.

 ◇윤 바오로의 성대한 세례식 

이 느닷없는 조선인 청년의 출현과 그가 가져온 서신에 담긴 내용은 중국 교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윤유일은 이후 날마다 성당을 찾아와 서신의 내용을 추가로 설명하고, 글로 미처 적지 못한 정황을 필담으로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그 세례가 과연 유효한 것인지를 회의하고 있었다. 그의 교리 지식은 훌륭해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엿새 뒤인 1789년 12월 22일, 그를 위한 특별 세례식이 대단히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중국 신자들 여럿이 입회했고, 대부는 당시 궁정 화가로 활동하고 있던 빤지(Joseph Panzi) 수사가 섰다. 윤유일은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아, 조선에서 두 번째 공식 세례자의 영광을 안았다. 성사를 받는 그의 표정에서 한없는 열정과 신심이 묻어났다. 지켜보던 중국 교우들마저 감정에 복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이 세례식의 광경은 북경의 천주교 신자들을 완전히 압도시켰고, 북경의 천주교계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구베아(왼쪽) 주교 초상화. 그는 조선에 한자 8,000자에 달하는 사목 교서를 작성해 보냈다. 오른쪽은 윤유일과 면담하고 영세를 주었던 로 신부의 초상화.
구베아(왼쪽) 주교 초상화. 그는 조선에 한자 8,000자에 달하는 사목 교서를 작성해 보냈다. 오른쪽은 윤유일과 면담하고 영세를 주었던 로 신부의 초상화.

윤유일의 대부였던 빤지 수사는 윤유일의 초상화를 그려 생 라자르(Saint-Lazare)로 보냈다. 이제라도 바티칸이나 유럽 교회 도서관 어디에선가 그의 초상화가 발견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전후의 광경은 1791년 2월 11일에 마카오 라자로회의 빌라(Giovanni Villaㆍ1752-1803) 신부가 옮긴 북경 주교의 편지 발췌문과 로 신부, 빤지 수사의 여러 편지 글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8,000자의 사목 교서 

윤유일은 귀국 시까지 여러 날 계속된 필담에서 엄청난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로 신부는 이 모든 필담을 자신이 속한 나자로회 총장에게 번역해서 보냈다. 가톨릭의 역사에서 달리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생적 교회의 창립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의 신심과 열정은 놀라웠고, 신앙의 파급 속도는 더 놀라웠다.

그들은 뒤늦게 사제직이 주교의 허락 없이 될 수 없고, 사제는 동정을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이 큰 죄를 범했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면서 북경 교회에 정식으로 선교사의 파송을 청원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들의 질문과 고민은 너무도 순진했다. 북경의 신부들은 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엄청난 섭리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북경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ㆍ중국명 탕사선(湯士選)ㆍ1751-1808) 주교는 조선 교회의 질문에 대답하고, 향후 사목의 방향을 자세히 적은, 한자로 8,000자에 달하는 사목 교서를 윤유일의 옷 속에 넣어 단단히 꿰매 주었다. 구베아 주교의 한문 사목 교서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가 1786년 2월 18일에 북경의 교우들에게 발표한 사목 교서만 구베아 주교의 고향 마을인 포르투갈의 에보라(Evora)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과 배려 없이 이 사목 교서에 적은 조상 제사 금지 조항이 조선의 천주교회에 얼마나 큰 타격을 가했고, 이로 인한 배교와 순교의 파장이 얼마만큼 큰 것이었을 지를 당시 구베아 주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윤유일의 두 번째 북경행 

윤유일이 1789년 2월말 북경 주교의 사목교서를 들고 귀국하자 조선의 천주 교우들은 환호했다. 멋대로 신부를 세워 성사를 집전한 것은 따로 나무라지 않았고, 구원을 받기 위한 상등통회(上等痛悔)에 의지하고, 성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 밖의 교리상 의문들도 대부분 해소되었다.

1790년 8월 13일은 청나라 건륭 황제의 80회 생일이었다. 이를 축하하는 진하성절사(進賀聖節使)가 황인점(黃仁點)을 정사로, 서호수(徐浩修)를 부사로 삼아 6월초 한양을 출발했다. 윤유일은 이 행차에 묻어 한번 더 북경으로 갔다. 교회의 수뇌부는 북경 구베아 주교의 사목 교서에 대한 답변 서한을 작성했다. 성신 강림 후 7번째 주일에 썼다고 했으니, 양력 7월 11일로 음력으로 환산하면 5월 29일에 해당한다. 출발 직전 서둘러서 쓴 편지였다.

이 답장의 서두에서 작성자인 이승훈은 “한 글자 한 글자에 모두 깊은 애정과 열성이 담긴 편지를 100번 가까이 읽고 또 읽으면서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고 적었다. 하지만 처음 편지를 받고 느낀 말할 수 없는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면서, “그 편지는 오히려 신자들을 이전보다 더 끔찍한 슬픔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지금 저희가 처한 상황은 마치 날이 저물어 당황한 여행자가 깜깜한 어둠 속을 헤매다가 멀리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도 그곳에 갈 수 없는 처지와 같습니다”라고 썼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교리를 직접 가르쳐 주고, 신앙생활을 좀 더 확실하게 인도해줄 사제를 한 분이라도 모셔야 한다며 이에 대한 주교의 확답을 요청하고 있었다. 윤유일은 2월에 귀국해 3개월 만에 다시 북경 길을 떠나야만 했다.

 ◇기쁜 소식 

이때의 연행사는 노정이 조금 복잡했다. 건륭 황제가 의주 국경에서 사신 일행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7월 10일 이전에 열하(熱河)로 직행할 것을 명했기 때문이었다. 서호수의 ‘연행기’를 통해 볼 때, 정사와 일부 수행원만 봉황성에서 북쪽 길을 따라 열하로 직행했고, 나머지 사행은 산해관을 거쳐 7월 1일경에 북경에 도착했다.

이후 8월 12일에 정사 일행이 열하를 거쳐 북경 남관(南舘)에 도착할 때까지 윤유일은 눈치 볼 일 없이 거의 날마다 북경 성당을 드나들며 그곳 신부들과 조선 교회의 사정을 놓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윤유일은 조선 국왕의 관리인 예비 교우 한 사람을 데리고 성당에 나타났다. 이들은 두 통의 편지와 조선 교회가 발행한 별도의 위임장을 들고 왔다. 편지는 선교사의 파송을 시종일관 간절히 호소하고 있었다. 선교사를 모셔가는 방법은 물론, 선교사가 조선에 오게 될 경우 그가 입을 옷까지 가져오는 열성을 보였다.

편지에는 1년 전 1,000명이라고 했던 조선 천주교도의 숫자가 어느새 4,000명으로 불어났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놀라운 기세였다. 북경 주교는 “전적으로 천주님께서 하시는 지극히 기적적인 일에 틀림없다”고 감탄했지만, 일부에서는 중국인들처럼 허풍을 떠는 것일 수 있다고 의구심을 드러냈을 정도였다.

당시 윤유일과 함께 왔다는 알파벳 표기 ‘U’로 표기된 조선 관리는 우(禹)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북경의 주교좌 성당인 남당에서 성세성사와 견진성사를 각각 따로 받았다. 북경 교회는 조선 교회를 위해 미사 예절에 필요한 성작(聖爵)과 미사 경본, 그리고 제대 위에 놓을 성석(聖石)과 각종 상본 및 여러 책자와 성물들을 보내주었다. 성석은 순교자의 유해나 유품이 들어 있는 돌판으로, 지금도 모든 성당 제대의 안쪽에 간직된 물건이다. 윤유일은 1791년 3월 동지사가 귀국할 때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겠다는 약속과, 그와 접선하고 안내하는 방법까지 정하는 성과를 안고 돌아왔다.

성당에서 받은 성물은 국경의 검문검색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씨 성의 관리가 임금에게 올리는 물품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는 임금께 가는 상자 속에 이 물건을 숨겨, 검열 없이 국경을 통과했다. 해가 바뀌면 북경에서 파견된 신부가 온다! 이 기쁜 소식에 조선 교회가 온통 술렁거렸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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