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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다와 탕탕의 지금은 여행 중(105)]흥얼흥얼 규슈 여행 ②구마모토~아소산

◇’초록 아소산 거쳐 후쿠오카까지’에서 이어집니다.

구마모토 시청 전망대에 오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구마모토성 일대(좌)와 빌딩으로 빈틈없는 시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마모토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마치 제주의 중산간과 비슷하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영화 ‘위대한 쇼맨’의 사운드트랙 ‘This is me’가 버스의 요동에 따라 심장을 들쑤신다. 날씨마저 제주에 변덕과 비슷하다. 흐린 것 같으면서 맑은 하늘이 보이고, 주저하듯 비를 뿌렸다가 이내 멈추는 ‘구린’ 날씨다. 이런 날엔 마음이 시를 쓴다. 내가 여기에 왔어, 이게 바로 나야! 고층 빌딩이 제법 보였다. 내리라는 신호였다.

구마모토성으로 가기 전과 후의 쉼터, 사쿠라노바바 조사이엔. 에도시대를 재현한 초미니 인사동 거리쯤 된다.
구마몬 캐릭터 상품이 아니면 구마모토에서 지갑을 열 일은 거의 없다.
대지진의 상흔, 그리고 치유

구마모토는 비(非) 관광지의 성격을 듬뿍 갖고 있다. 마스코트인 구마몬 외에 이렇다 할 소도시의 매력이 소실된 까닭이다. 간사이 지방의 나라(奈良)처럼 아기자기한 맛도 없다. ‘지름신’을 영접할 것 같아 주저하게 되는 작은 숍의 가성비도 뚝뚝 떨어진다. 구식 트램이 구석구석에 덜커덩 소리를 뿌리고, 시내 곳곳이 공사판이다.

1607년 완공된 구마모토성의 형태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에, 세상의 미스터리가 추가된다.
구마모토성 일대 곳곳에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투병 중인 천수각의 모습을 드러내는 가토 신사.
구마모토에 왔다는 인증샷이 되는 천수각 옆 우토야구라. 지진에도 부상이 적은 단단함의 결정체다.

지난 2016년은 구마모토에 비극의 해였다. 규모 6.5의 전진과 7.0의 본진이 구마모토를 강타했다. 지진은 여진이 더 무서운 법이다. 언제 어떤 식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공포 속으로 사람을 끌고 간다. 사상자는 1,100명을 넘겼다. 구마모토 성터의 돌담은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아소대교는 산 한가운데에 주저 앉았다. 비극의 세월이 흘러 희망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시내가 평면으로 펼쳐지는 시청 전망대에 올랐다. 크레인이 호위하는 가운데 구조물의 보호대를 찬 대천수각이 보이지만, 브로콜리처럼 무성한 나뭇가지에 가려진다. 무너진 구마모토 성터의 돌은 일일이 번호를 매겨 기록된 위치에 다시 쌓일 예정이다. 복원 작업에 향후 붕괴까지 예방하자는 의지가 녹아 있다. 구마모토의 상흔은 그렇게 치유되고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란 느낌이 이런 걸까. 구마모토의 첫인상은 ‘느슨함’이었다. 같은 소도시이지만 나라의 엄격함에 비하면 나사가 풀린 듯하다. 일본 특유의 결벽증에서 오는 숨 막힘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길가에 버려진 담배꽁초도 반갑고, 빨간 신호등에서 무단 횡단하는 모습도 정겹다. 결코 아름다울 리 없는 모습에서 난 이번 여행이 재미있어질 거라는 작은 위안을 받게 되었다.

우여곡절, 일본에서 국제운전면허증 받기
2021년까지 유효한 신상 국제운전면허증이 일본에선 무용지물. 안내 책자의 저 A4 용지 원본이 필요했다.
JAF 근처에 편의점과 슈퍼마켓만 있어서 놀랐다. 그 흔한 카페조차 없어 더 놀랐다. 버스를 기다리며 길바닥에서 1시간째 구름 세는 중.

우리의 관심은 구마모토 시내 외곽에 있었다. 한국에서 미리 버드젯(budget)을 통해 렌터카를 예약했다. 아침부터 서둘렀다. 끝내주는 날씨가 춤추게 한 탓이다. “가자, 아소산으로!” 그런데, 마음은 이미 아소산 정점에 가 있었지만 렌터카 회사가 발목을 붙잡는다. 탕탕이 소유한 국제운전면허증으로는 불허한다는 비보다. 1968년 비엔나 협약 하의 면허증인 걸 그제야 보았다. 일본은 1949년 제네바 협약을 따랐다. 렌터카 측은 백과사전처럼 일본어만 빼곡한 서류를 내밀었다. 요인즉, JAF(일본자동차연맹, Japan Automobile Federation)에서 발급한 면허증이 별도로 필요하다는 거다. 왜 예약 당시 알려주지 않았냐는 원망이 무슨 소용이랴. 탕탕의 프랑스 국제면허만 믿고, 인천공항에서 국제면허증을 발급할 기회를 걷어찬 자신을 질책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만 유효한 국제면허증 번역본은 3,000엔. JAF 사무실까지 오가는데 980엔…. 우리는 세트이니, 2인분의 피 같은 돈이 거리에 버려진다. 그렇다면? 혹 편법과 친할지 모르는 다른 렌터카 회사로 갔다. 한 곳은 예약이 꽉 찼다고 손사래를 치고, 다른 한 곳은 방법이 없다며 단호박 자세였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아소산이다. 지진으로 인해 기차도 멈춘 그곳까지 중년의 두 다리로 갈 방도가 없다.

답은 JAF 한 곳에만 있었다.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사무실은 허허벌판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도 업무 처리는 재빨랐다. 1시간을 조금 넘기자 그 놈의 서류가 우리 품에 안겼다. 벌써부터 그래, 참 재밌다. 여행은 내 맘처럼 되지 않는다. 많이 하든, 적게 하든 공평하다.

모든 설움은 이곳에 버리고 가시게. 아소산을 가기 전, 원망과 미움은 이 스이젠지조쥬엔 호수에 버리자. 일본 최고의 호수인 비와호의 축소판이다.
이 석등만은 지진에도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 재앙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자 희망이 버티고 있다.
빛과 그림자, 구름마저 빚어낸 듯 완벽한 자연. 전형적인 모모야마 시대의 정원이다.

렌터카 회사로 돌아오니, 오후 3시다. 얄궂은 그 서류를 들이밀자 탕탕에게 운전대를 잡을 자격이 주어졌다. 본격적으로 아소산으로 달리기 전, 구마모토 시내의 스이젠지조쥬엔 공원으로 향했다. 중심에 연못이 자리잡고, 이즈미 신사에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전수관으로 도는 서클형 정원이다. 조약돌을 밟으며 내딛는 나의 발걸음이 곧 음악이다. 신사 앞의 ‘신의 물’은 매일 아침 다섯 홉을 마시면 장수한다고 알려졌다. 과다 복용 후 걷는 기분은 고요에 가깝다. 자, 이제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향해 달릴 것이다. ‘빨리’보다는 ‘느리게’를 지향하는 이유도 있었고, 되도록 자연과 가까이 가는 길을 원한 탓이다. 곳곳에 지진의 내상이 가슴을 졸리게 했지만, 그 걱정을 내려놓을 풍경이 지척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린 카펫이여.

펄펄 끓는 활화산인 아소산 일대의 여행으로 이어집니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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