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과잉대응보단 과학적 확신이 먼저다

입력
2018.09.16 20:0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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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 년 전엔 결핵에 걸렸다 하면 초상 치르는 줄 알았다. 위생상태도, 영양상태도 치료제도 변변치 않았으니 그랬다. 강한 전염성과 피를 토하게 만드는 독한 증상으로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던 이 전염병은 환자 격리가 공동체를 보호하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국민의 과잉 영양을 걱정할 지경인 지금도 이 나라에서 결핵은 창궐(?)하고 있으니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발병률과 사망률에서 선진국(OECD) 가운데서 그냥 1위가 아니라 압도적 격차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의심스러우면 보건복지부나 세계보건기구의 기가 막힌 통계를 보시라. 그럼에도 그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6.25전쟁이나 높은 인구밀도 등 그런 게 원인이 아니겠느냐는 수준이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심각하게 취약성을 보였다. 면역력이 현격히 떨어진 에이즈 환자를 제외하곤 일반적인 결핵환자가 드문 선진국이 연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왜 한국인만 유독’이라는 비교 분석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영양상태나 면역력 문제라면 20, 30대 한국 청년층의 높은 발병률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인만 유독’이라는 궁금증에 대해 비단 결핵만이 아니라 호흡기 세균, 바이러스에 취약한 민족 특이성, 환경적 요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과잉인가. 병원감염이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중동 외 지역으로는 최대규모 메르스(중동 호흡기 증후군) 확진 환자가 발생한 나라다.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신종 바이러스가 과거와 달리 특정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 공포의 세계화 시대에 이런 의심이 쓸모 없지는 않을 것이다. 2003년 사스(중증 호흡기 증후군), 2012년 메르스 등 동물에서 유래돼 인간에게 전파된 호흡기 계통의 신종 바이러스는 주기적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동물에서 전파된 변종 인플루엔자는 언제 새로운 게 툭 튀어나올지 모른다. 당장 백신도, 효과적인 치료제도 없다. 수 백 년 전이나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지금이나 괴질의 가장 효과적인 방책은 여전히 격리다.

중동으로부터 다시 메르스 환자가 국내로 유입됐고, 이낙연 총리는 확진 직후 “늑장대응보다 과잉대응이 낫다”며 결연한 차단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곳곳에서 구멍이 뚫렸다. 인천국제공항 검역 문제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예상치 못했던 일반접촉자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일반접촉자 가운데 소재파악이 되지 않은 외국인이 지금도 있다. 비즈니스석에 탄 확진 환자의 서비스를 맡았던 외국인 승무원들은 이틀간 호텔에 격리됐다. 사스의 전 세계적인 전파 경로 원점이 홍콩의 한 호텔 엘리베이터로 추정하는 세계보건기구 역학조사 결과를 안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신종 전염병과 관련한 과잉 대응의 한 사례는 2003년 사스 때 있었다. 사스 확산국가인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여행객이 의심환자 판정을 받고도 자가 격리 권고를 무시하고 집밖으로 나도는 바람에 보건당국이 공권력까지 동원해 강제 격리한 일이다. 당시로선 신종 전염병과 관련한 법률 미비에 따른 초법적 조치로 사후 법적 보완이 이루어졌다. 이 정도 강단은 직을 건 공무원의 과학적 경험적 확신이 없고선 불가능하다.

이번 메르스 위기는 확진 환자 발생 열흘이 된 지금까지 밀접접촉자나 의심환자들이 음성 판정을 받아 추가환자 발생이나 확산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자축할 수만은 없는 게 1차 메르스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 당국의 그물망이 여전히 정밀하지도, 촘촘하지 않다는 게 입증된 마당이다. 다시 한번 검역과 역학조사 시스템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제도적, 법적 보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막연한 말의 향연이 아니라 과학과 경험에 근거해 필요한 수단이 강구되도록 해야 한다. 메르스 실패 경험에 비춰보면 국가 마비상태를 겪느니보다 국가 비상사태를 받아들이는 게 낫다. 물론 메르스 감염을 거의 확신한 것으로 보이는 확진 환자의 이상한 행적만 보면 당국의 그물망 탓만 하기도 그렇다. 어떤 이상적인 제도나 법도 그 나라의 문화, 높은 국민의식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헛일이다.

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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