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북-미 관계의 선순환과 남북정상회담

입력
2018.09.16 11:02
29면

한국과 미국의 대북 정책이 공유해 온 3가지 핵심 목표는 평화체제-한미동맹-비핵화였다. 이 확고부동한 3가지 목표가 최근에 들어 3위1체 불가능론이라는 비관에 부딪히고 있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며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CVID)” 수준의 비핵화를 하자니 전쟁불사론이 등장했고, 평화협정을 앞세우며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자니 주한미군 철수라는 동맹폐기 괴담이 떠 돈다. 그렇다고 북한 핵을 인정하고 그들로부터 주한미군의 주둔을 인정받는(?) 평화체제라는 터무니없는 대안을 수용할 수는 없다.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소극적 현상유지론이다. 그래서 평화 이론가인 구갑우 교수는 이를 트릴레마(trilemma) 즉, 평화체제-한미동맹-비핵화의 3위1체 불가능론이라 불렀다.

과연 3가지 목표는 트릴레마인가?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미동맹이 힘을 동원해 비핵화를 강제해 온 지난 10년 우리가 목도한 위기론이다. 이명박, 박근혜 전 정권 10년 치세 동안 지긋지긋하게 강조해 온 이 해법은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힘의 논법에 근거한다. 물론 10여 년 전 그런 등식이 유효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면서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핵화 정책이 실패하여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강화됨에 따라, 한반도는 비핵화를 집행하기 위해서 평화를 버려야 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비핵화가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사실이나, 평화체제는 개념만으로도 비핵화를 앞선다. 비핵화가 평화의 수단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뜻이다. 역사의 어느 때에 우리는 비핵화가 평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비핵화는 곧 평화라는 등식에 빠져들었다. ‘비핵개방 3000’이었다. 이제 목표는 상실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지표의 하나인 비핵화 그 자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수단과 목적의 도치가 불러온 광기는 종종 이성을 가진 많은 시민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상황을 연출했다.

밥 우드워드의 신간 ‘공포: 백악관 안의 트럼프’는 오바마의 분노와 좌절에 대해 얘기한다. 이미 2016년에 오바마는 북한의 비핵화를 힘으로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분노했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같은 정보 판단을 인수인계한 것 역시 분명하다.

실제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년 북한과의 말싸움을 허언으로 하면서까지, 한미동맹과 평화체제를 두 축으로 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후순위로 하는 새로운 정책을 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아니었다면 미국은 지금쯤 북한과 전쟁 중이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결단을 강조하곤 한다. 북한의 선 행동 조치를 요구하던 전 정부와 달리 트럼프 대통령은 조건없이 북한과의 정상회담에 나섰다. CVID라는 전통적 목표 대신에 검증에 초점을 맞춘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라는 수정된 기준을 들고 나왔다. 비핵화보다 평화체제와 한미동맹이라는 두 축을 앞세움으로써, 3가지 모두를 살려 트릴레마를 해결하고자하는 트럼프식 해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평화체제-한미동맹-비핵화라는 세쌍둥이 목표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다스리는 분명한 방법은 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하는 것이다. 비핵화 대신에 평화체제를 형님으로 모시는 새로운 질서가 눈에 익을 때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견인하고 궁극적으로 한미동맹을 격상시키는 메커니즘에 눈 뜨게 될 것이다. 남북대화가 평화체제를 견인하면 북미대화가 뒤따르고 그에 따라 비핵화 합의가 진전되며 그 결과 한미동맹은 더욱 굳건해진다.

군사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를 위한 남북대화가 트릴레마를 푸는 격발장치라는 점을 자각하는 순간 남북대화에 대한 자신감은 분명해진다. 시간이 걸릴 수는 있어도 남북대화는 북미대화의 선행지표다. 남북대화를 통한 군사긴장완화 즉 평화체제의 진전은 나머지 목표를 이끌어가는 맏형이다. 평화체제를 앞세운 남북관계 앞에서 통미봉남이라는 괴담이 버티기 어려운 것도 그래서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기대와 낙관을 가져도 좋다는 근거이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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