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근 칼럼] 전쟁터가 된 학교

입력
2018.09.11 18:30

 학교를 피아 불명의 전장 만든 내신 

 경쟁 내몰린 학생 심성도 피폐해져 

 하루 빨리 절대평가로 전환이 해답 

공간은 정신과 영혼을 지배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동이나 청소년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성인의 정신세계나 마음의 습관 역시 삶을 영위하는 공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유학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문득 필자의 심성이 적잖이 황폐해졌음을 깨달았다. 공부가 힘들긴 했지만 그게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밤길에 낯선 사람이라도 맞닥뜨리면 늘 바짝 긴장해야 하는 환경에서 5년 가까이 지낸 게 문제였다.

필자가 대학원 과정을 마친 대학은 시카고 남부 흑인 빈민가에 둘러싸여 있다. 시카고가 어떤 곳인가. 예나 지금이나 총격사고가 빈발하기로 악명 높은 도시다. 현지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이미 2000명 넘게 총에 맞아 33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처럼 살벌한 시카고에서도 남부 빈민가는 범죄에 특히 취약해 그야말로 전쟁터나 진배없는 곳이다. 그런 지역과 인접한 캠퍼스에서 안전 욕구를 최고 수준으로 작동시키며 5년을 보냈으니 심성이 황폐해진 게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딱 한 번 시카고 남부 빈민가 한 복판을 스치듯 지나간 적이 있다. 일부러 그곳을 찾았던 건 아니다. 필자를 처음 대학에 데려가던 지인이 길을 잘못 들었던 터였다. 대낮인데도 뭔가에 취한 노숙자들이 흐느적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풍경에 숨이 탁 막혔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 차에 다가와 게슴츠레한 눈으로 차안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형언하기 어려운 섬뜩한 공포와 전율이 엄습했다. 필자는 미셸 오바마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다. 어찌 그런 동네에서 나고 자라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백악관의 안주인까지 될 수 있었단 말인가.

뜬금없이 살벌한 시카고 남부 얘기를 꺼낸 건 광주과학기술원(GIST) 김희삼 교수가 최근 발표한 연구결과 때문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대학생 가운데 80.8%는 고등학교를 ‘사활을 건 전장(戰場)’으로 여긴다고 한다. 같은 생각을 가진 대학생 비율이 중국 41.8%, 미국 40.4%였고 일본은 13.8%에 불과했다. 과도한 입시 경쟁 때문에 한국 학생들의 심성이 얼마나 심각하게 뒤틀리고 피폐해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아닌가 싶다.

한국 고등학교를 전쟁터 같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내신제도다. 대입에서 내신의 중요성이 크게 증가하면서 더욱 그렇게 됐다. 내신제도는 옆자리 짝꿍조차 밟고 일어서야 하는 대상으로 만든다. 기실 대학 진학에 유리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내신 경쟁은 중학교 때 시작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강도가 높아져 고등학교 3학년 1학기에 정점에 다다른다. 대다수 고등학생은 물론 일부 중학생까지 피아가 불분명한 전쟁터에 내몰린 배경이다. 이런 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학생들이 고결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로 남아주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실제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피를 말리는 내신 경쟁에 오랫동안 시달린 탓에 느긋함과 여유를 잃어버린 채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걸 힘들어 한다. 각자도생에는 능하지만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는 다소 무관심한 편이다. 취업난 탓이기도 하지만 성적에 전전긍긍하며 학점을 따기 어려운 강좌는 아예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한 마디로 희생과 배려를 체화해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지도자감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학생들을 더 이상 피아 구분이 어려운 비정하고 잔인한 전쟁터로 내몰아선 안 된다. 하루라도 빨리 내신을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 비교육적인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전환하지 않는 한 진정한 참교육의 구현은 연목구어에 가깝다. 그런데도 교육부가 내신 절대평가의 전면 시행을 2025년으로 미룬 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언제까지 변별력 담보를 핑계로 수많은 학생들에게 극심한 심적 고통을 안기며 시대 적합성을 결여한 교육을 이어가야 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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