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의 시 한 송이] 채광

입력
2018.08.23 18:21
29면

누구나 알다시피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구조물을 만들었지요. 안을 만들면서 밖도 포기하지 않아 창이라는 것을 그렸지요. 안팎을 공평무사하게, 가감없이 보여주는 창을 인간은 전망 또는 현명한 시선이라는 관념으로도 치환하지요. 열고 닫는 권리를 부여하고, 창을 창문이라고 부를 때, 관념은 보다 견고해지지요. 한없이 선명한 사물인 창이 인간의 시선이 깃든 창문이 될 때, 창문에는 완강한 것, 은폐된 것, 왜곡된 채 오래 된 것, 그러므로 ‘깨버려야 하는 투쟁’이 나타나지요.

창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난이거나 창을 깨야 하는 당위를 가진 경우,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면 돌을 던지고 곧 잊어버리겠지요. “깨지지 않는다”와 부딪치고 생각날 때마다 계속 던지는 이는 ‘깨져야 한다’의 정당성을 본 사람이지요. 빛의 굴절을 따라 밤에는 더 아름다워지는 아이러니가 창문이라고 해도, 창문의 윤리를 생각하기 시작한 존재라면, 몸을 던지고 창은 깨지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되돌려 받지요. 그럼에도 이 부딪치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지요.

왜 그렇게까지 해?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니? 고투를 멈출 수 없는 존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투명한 창문 안에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밖으로 나와 서 보는 것에서부터. 빛이 어떻게 창을 뚫는지를 보는 것에서부터. 창이 빛을 어떻게 담는지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뒤틀린 것이 바로 잡혀, 옳게 열고 닫을 수 있을 때부터 창문. 안 그러면 창문도 아닌 것을 계속 창문이라고 믿고 살아가게 되지요.

이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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