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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악재-국민연금 논란 겹쳐 지지율 급락
실사구시 앞세워 저항 뚫고 규제 혁신 앞장
일자리ㆍ성장 등 과제 산적…정부 시험대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3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해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민연금 개편 논란이 정부의지와 다르게 불거진 과정을 질책하고 공항 입국장 면세점 도입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는 등 규제혁신 행보를 이어갔다. / 고영권기자

19대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해 4월 중순 문재인 대통령은 KBS 토론회에서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와 얼굴을 붉힐 정도로 언쟁을 벌였다. 2028년까지 40%로 낮아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겠다는 자신의 공약에 대해 유 후보가 실현 불가능한 포퓰리즘 공약이라고 추궁한 게 발단이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국회 특위의 공무원 연금 개혁 때 여야가 합의한 사항”이라고 역공했으나 당시 합의문에 그런 내용은 없었다. 결국 문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기간 등의 설계를 잘하면 보험료 증가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대체율 인상) 방안이 있다”고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이런 기억을 가진 문 대통령이니 국민연금 개편을 둘러싼 최근에 논란에 화들짝 놀랄 만도 하다. 자문기구 검토안이라고 둘러댔지만, 개편의 초점이 노후보장 확대보다 기금 고갈 보전에 맞춰졌고 결국 보험료율 인상과 지급시기 이연이 불가피하다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났으니 말이다. “여론이 들끓는다는 보도를 보았고 대통령이 보기에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관련부처의 눈치 없는 정책과 홍보를 나무란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통령이 “노후소득 보장 확대가 우리 정부 복지정책의 중요목표 중 하나인데 정반대의 방침이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알려진 연유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일방적 개편은 결코 없다”고 거칠게 단언한 것은 그만큼 국정상황을 엄중하게 본다는 뜻일 게다. 최근 공표된 대통령 지지율의 급락은 그 신호다.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게 청와대의 공식입장이지만 지방선거 직후 추세적으로 하락해 50%대까지 떨어진 내용을 뜯어보면 사안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지난 1년 문 정부의 적폐 청산 드라이브와 한반도 평화정착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공정과 정의를 앞세운 J노믹스 패러다임에 기대를 걸었던 중산층이 피로감을 느끼며 지지대열에서 이탈하는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과속과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후폭풍과 부작용 탓이라고 하나, 문 대통령이 당ㆍ청에 특별히 강조한 민생관리의 유능함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있는 점이 더 아프다. 국민연금 문제만 해도 저출산ㆍ고령화가 고착화한 현실에서 소득대체율 공약을 지키려면 보험료율을 인상하거나 재정 보강을 법제화해야 한다. 그러나 두 방안 모두 세대 갈등과 정부 불신을 피할 수 없어 얘기조차 어렵다. 그나마 기금 수익률이 호전되면 도움이 되겠으나 문 정부 출범 이래 기금운영본부장 자리는 1년 이상 비어 있고 수익률은 되레 뒷걸음질이다.

국민연금 논란은 집권 2년에 접어든 문 정부의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의 밥과 살림살이에도 평화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길이 멀기만 하니 말이다. 보수 야당과 언론의 공격은 그렇다 쳐도, 진보진영 지식인까지 나서 “정부가 재벌ㆍ지주ㆍ관료에 포획당해 촛불이 명령한 사회경제개혁 궤도를 이탈했다”고 몰아치니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일정과 동선을 일절 밝히지 않은 휴가지에서 돌아온 문 대통령이 첫 화두로 던진 ‘실사구시의 과감한 실천’이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이 화두에 따른 첫 행보로 그는 인터넷전문은행의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천명했다. 진보진영의 반발이 거셌지만 19세기 말 영국 자동차산업의 발목을 잡았던 ‘붉은 깃발법’을 인용하며 “규제혁신은 속도와 타이밍이 생명”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7월 하순 의료기기 규제 현장에서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규제이고 무엇을 위한 규제냐”고 통탄했던 기류가 더 강해졌다. 논란을 빚어온 공항 입국장 면세점 도입을 지시하고 참여연대 등이 반대해 온 개인정보보호법 완화도 밀어붙인다고 한다.

불을 보듯 뻔한 저항을 무릅쓰고 문 대통령이 칼을 빼든 이유는 뭘까. 바로 그 저항의 고리를 끊는 혁신적 발상이 아니면 일자리도 성장도 없고, 개혁의 동력마저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일 것이다. 국정을 책임진 위치라면 기업의 이사처럼 성과로 말해야 하고, 감사처럼 놀아선 안 된다. 길 떠나는 문 대통령을 강퍅한 논리로 막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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