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은 선거 중] ‘식량 주권’ 헌법 명문화 추진... 스위스 농민운동 성공할까

입력
2018.08.02 18:00
수정
2018.08.02 19:5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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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발안 등 직접 민주주의 활성

유권자 10만 서명 받으면

헌법 개정안 발의 가능

# ‘식량 주권’ 헌법 규정 국가 전무

해외 단체 찬성 속 연방은 난색

‘식량 안보’ 투표선 78.7% 찬성

스위스에서 국민투표가 치러진 지난해 9월 24일 수도 취리히의 한 투표소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투표 용지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국민투표에선 ‘식량 안보’ 헌법 조항의 신설 여부 등 3개 안건이 처리됐다. 취리히=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스위스에서 국민투표가 치러진 지난해 9월 24일 수도 취리히의 한 투표소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투표 용지들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국민투표에선 ‘식량 안보’ 헌법 조항의 신설 여부 등 3개 안건이 처리됐다. 취리히=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구촌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러시아 월드컵 개막 사흘째인 지난 6월 16일, 스위스 공영언론 ‘스위스인포(swissinfo.ch)’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월드컵이 축구 시합이 아니라, 각 나라의 직접 민주주의 수준으로 결정된다면 어떨까?” 월드컵 본선에 오른 32개국의 직접 민주주의 발전 정도를 한번 비교해 보자는 흥밋거리 기사였다. 러시아 월드컵 우승은 프랑스가 차지했지만, 이러한 ‘가상 월드컵’의 우승국은 ‘주최 측인’ 스위스라는 게 기사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자국을 무작정 자화자찬하는, 이른바 ‘과도한 애국주의’ 기사로만 폄하하는 건 온당치 않다. 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가 시민이 선출한 대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대의제’를 채택한 상황에서, 스위스는 실제로 직접 민주주의가 가장 잘 발달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의 정치체제처럼, 국가 정책의 결정이나 집행에 대한 ‘국민의 직접 참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제도화돼 있다는 얘기다.

스위스는 국민투표(referendum)와 국민발안(popular initiative) 제도가 가장 활성화돼 있는 국가다. 다른 나라에선 헌법 개정 등 국가의 기본 틀을 정하는 중요 안건에 대해서만 실시되는 국민투표가 스위스에선 매년 3, 4회씩, 마치 백화점 정기 할인행사처럼 치러진다. 국민투표의 문호를 폭넓게 개방해 두고 있어서다. 헌법 개정은 물론, 유럽연합(EU)이나 유엔 등 국제기구 가입 문제도 반드시 국민투표(2001년 EU 가입 부결, 2002년 유엔 가입은 가결)를 거쳐야 한다. 또 새 연방법안이나 수정안에 반대할 경우 투표권을 가진 시민 5만명의 서명만 받으면 누구나 국민투표를 요청할 수도 있다.

게다가 국민발안 제도는 시민들의 ‘헌법 개정안 발의권’까지 보장하고 있다. 최소 7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단체가 헌법 개정안을 마련, 18개월 안에 유권자 10만명 이상의 서명과 함께 제출하면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의 심사를 거쳐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그리고 총 투표자의 과반, 26개 주(canton)의 과반이 동시 찬성(이중 다수결)할 경우 헌법 개정이 확정된다. 비교적 적은 인구(850만여명) 탓에 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문자 그대로 ‘국민의 힘’에 의해서 헌법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지난 5월18일 스위스 서부의 한 사탕무 밭에서 농민들이 신형 제초기 테스트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5월18일 스위스 서부의 한 사탕무 밭에서 농민들이 신형 제초기 테스트를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국민발안’ 통해 시민도 헌법 개정안 발의

다음달 23일 예정된 올해 세 번째 국민투표는 스위스 농업 정책의 앞날뿐만 아니라, 전 세계 농민 운동에도 커다란 파급 효과를 미치는 중대 이정표가 될 듯하다. 투표 안건은 ▦자전거 도로, 보행로, 등산로 관련 연방법안 ▦공정 식품 이니셔티브(Fair Food Initiative) ▦식량 주권 이니셔티브(Food Sovereignty Initiative) 등 3개다. 이 가운데 국민발안으로 회부된 공정 식품, 식량 주권 관련 이니셔티브 2건은 헌법 개정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건 ‘식량 주권’ 개념을 헌법에 명문화하자는 식량 주권 이니셔티브의 통과 여부다. 그동안 농업의 가치를 헌법에 반영하고자 힘써 온 스위스 농민 운동의 ‘완결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16년 3월 30일 스위스의 진보 농민단체 ‘유니테르(Uniterre)’는 10만9,000명의 서명을 받아 이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정부는 국민의 사회적ㆍ환경적 기대치에 부합하고, 스스로 비용을 감당하는 ‘다양한 농업 체계’를 통해 건강한 식량 공급을 증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전자 변형 식품의 생산 및 수입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현재 전 세계에서 식량 주권이 규정돼 있는 헌법을 보유한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초국적 소농연대조직 ‘비아 캄페시나(Via Campesinaㆍ농민의 길)’를 비롯, 70개 이상의 해외 단체들이 스위스 농민들의 이런 노력에 지지를 표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문재인 정부 들어 본격화한 개헌 논의를 맞아 “농업의 공익적 가치와 식량 안보 등에 대한 헌법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농업계도 스위스 국민의 판단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전망은 밝다. 무엇보다 이번 국민발안의 전편 격인 지난해 9월 24일 ‘식량 안보(Food Security)’ 헌법 조항 신설 관련 국민 투표에서 스위스 국민은 ‘78.7% 찬성’이라는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 결과, 1996년 연방헌법 개정으로 탄생한 농업 조항 제104조(농업의 지속가능한 발전, 농업의 다원적 기능, 농업기금 조성 등)에 ▦농지 등 생산기반 보존 ▦식량자원 낭비 방지 등으로 ‘식량 안보’를 명시한 제104조a가 새로 추가됐다. 세계 최초의 식량 안보 헌법 규정이었다. 국토의 4분의 3이 산악지형이라 경지 면적이 애초 부족한 데다, 농업 경쟁력도 낮아 오랜 세월 동안 식량 부족에 시달렸던 경험으로 인해 ‘농업 강화’에 상당히 우호적인 스위스의 여론이 반영된 결과다. 때문에 이번 ‘식량 주권’ 사안에서도 엇비슷한 찬성표가 나올 공산이 크다.

2014년 1월 스위스 시민들이 한 달 후의 반(反)이민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시위자가 들고 있는 팻말에 쓰여 있는 문구는 ‘공포+배제=무익한 스위스’라는 뜻이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 1월 스위스 시민들이 한 달 후의 반(反)이민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시위자가 들고 있는 팻말에 쓰여 있는 문구는 ‘공포+배제=무익한 스위스’라는 뜻이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투표 가결 땐 세계 첫 ‘식량 주권’ 헌법

하지만 낙관은 아직 이르다. 연방정부와 연방의회는 식량 주권이든, 공정 식품이든, 이번 헌법 개정 요구 2건 모두와 관련해 국민에게 ‘반대 권고’를 하고 있다. 스위스가 각국과 맺은 자유무역협정(FTA)과 상충돼 국제 경쟁력, 식품 산업 혁신 역량을 떨어뜨리고, 소비자들의 식품 선택권도 제한하는 ‘불필요한 조항’이라는 이유다. 또 1891년 국민발안제 도입 이후 실제로 국민투표에 회부된 210건의 국민발안 중 가결된 사안이 22건뿐이라는 사실도 부정적 요인이다. 앞서 지난 6월 국민투표에서도 민간 은행의 대출업무를 금지하고 중앙은행이 국가 전체의 대출 총량을 관리토록 한 ‘주권 통화(sovereign money)’ 국민발안은 75.7%의 반대로 부결됐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스위스의 이 같은 직접 민주주의는 사회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현지 온라인 매체인 ‘더 로컬’은 “부결될 때에도 국민발안은 정치적 토론을 촉발하고, 정치 이슈에 대한 시민의 참여와 지식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며 “정당들도 당의 노선을 넘어, 광범위한 공동체의 합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스위스인포가 이 나라의 ‘직접 민주주의 월드컵 우승 비결’에 대해 “국민발안, 국민투표라는 우리의 위대한 경험이 ‘차이’를 만들었다”고 설명한 건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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