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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보다 뒤진 곳이 많은 우리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격차가 좁아졌다. 분발하여 역전시킬 날을 고대하며 한일 격차의 생성ㆍ확대와 축소의 배경을 살펴본다. 생성 등의 배경으로 리더층의 편협한 세계관과 포용성, 차별적 신분제에 따른 인재 손실, 드문 개혁과 빈약한 재정, 장인 박대와 낮은 농업생산성, 후순위의 민생과 서민문화, 약한 분권과 문약한 조정의 6가지를 고려한다. 축소 배경으로는 외세에 의한 피지배, 전쟁에 따른 신분제 타파와 의식 개혁 등을 주목한다. 양국 리더층의 세계관과 포용성 검토에 앞서 600년 전 확인된 두 나라간 차이를 보자.

관련된 최초 공식 기록은 통신사 박서생의 소(疏)를 검토한 1429년 12월 3일자 세종실록일지 모른다. 이는 그가 일본에서 보고 확인한 바를 토대로 제안한 것을 조정이 검토한 내용으로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주목받지 못한다. 그런데 이 제안이 799년 신라 때의 국교 단절 후 고려 500년을 거치면서 벌어진 차이가 15세기 전반에 꽤 확대되었음을 시사한다.

약한 규제 하에 자율적으로 운영되는 시장과 관련 제도, 시장 가판대에 품명이 적혀 진열된 상품, 수차가 보급된 농지, 일상화된 목욕 문화와 수준급 위생 관리, 욕탕요금과 숙식대 지불, 통행세ㆍ어량세ㆍ선세 납부시 동전 등 화폐 사용, 금ㆍ은ㆍ동 등 희귀 금속의 채취 허용과 낮은 세 부과 등이 그것이다. 제안에서 언급되지 않은 잘 정비된 도시와 가도, 가도변의 2층 주택가, 잘 닦인 수로 등은 수용가능성을 고려하여 뺐을 것이다.

시각에 따라선 대표적 실격의 역사인 임진ㆍ정유전쟁을 160여 년 전 박 서생의 보고로 확인된 양국간 차이를 제때 시정하지 않아 치른 대가로 볼 수도 있다. 전쟁 발발 시의 일방적 피해를 막으려면 미리 열린 인재 등용, 상공업 진흥, 군비 강화에 나서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조선 리더층의 좁은 세계관과 포용성이 주목할 대상이다. 명종과 선조대 두 유학자의 소를 보자.

이황은 1545년 7월 27일자 소에서 전년 4월 사량진왜변으로 조정이 통교 불허 등 강경책을 펴려 하자 유화적 접근을 강조하며 대일정책과 국방을 논한다.

“지금 천변이 나타나고 인사가 잘못되어 큰 화가 겹치고, 국운이 꽉 막혀 근본이 불안하고 변방이 허술하며, 병력과 군량이 고갈되어 백성이 원망하고 귀신도 분노하니(중략) 섬 오랑캐의 사신 파견 기대를 끊고… 전쟁을 야기하는 단서 열어놓고 전란 조짐에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아… 지금 사세로는 반드시 잘 대응한다는 보장 없어”라면서 외교 실책이 국토 유린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조정은 수용하지 않다가 2년 뒤 1547년 정미약조로 제약하의 통교를 허용한다.

비슷한 우려가 1582년 9월 1일자 이이의 소에도 나타나 전쟁 개시 47년 전부터 심각한 상황이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며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할 경우… 방어할 만한 병력도 없고 먹을 만한 곡식도 없고…”

다음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기독교와 서구의 정보, 문물을 전한 포르투갈인 프로이스(L. Fróis)의 사례다. 그는 인도 고아에서 자비에르를 만나 예수회 신부 훈련을 받고 31세 때인 1563년 선교차 방일하지만 1569년부터 교토에서 저작에 몰두한다. “일본과 유럽 문화비교 1585”와 “프로이스 일본사”가 유명하다. 전서는 일본의 풍습과 인물을 서구에 소개하는 소중한 자료이고, 후서는 16세기 후반의 선교 활동과 위 두 권력자 및 유력 기독교도 대명을 고찰하여 이 시대 일본 역사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적인 사료다. 전 12권의 일어판이 1977년부터 순차적으로 간행된다.

노부나가를 18회나 만난 프로이스는 그가 호기심이 많아 새 것을 좋아하고 논리 정연한 얘기를 즐기며 조언을 경청하고 기독교 포교에 너그러운 것을 크게 반긴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해” “기독교 믿는 가신이 애인과 살자 ‘기독교 가르침에 반하는 게 아니냐’며 그를 꾸짖다… 훗날 여전히 애인과 사는 것을 알고 가신 해고” 등의 서술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면 일본에선 프로이스 등 서구인의 지식ㆍ정보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등 시야가 넓은 지도자의 때ㆍ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이들의 부국강병 추구를 지원한다. 단 히데요시의 ‘호대희공’인 조선침략은 실패한다. 조선에선 미래를 내다 본 이황과 이이의 재난 대비 촉구의 소가 명종과 선조에 의해 거부되고, 변혁을 기피하고 백성의 눈높이와 거리가 있는 신하의 간언은 곧잘 수용된다. 조선 말기의 극도로 확대된 격차는 이런 상황의 연속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작금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된 이명박ㆍ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 동안 보여준 시대와 동떨어진 상황 인식과 대응은, 우리 리더층이 갖춰야 할 세계관과 포용성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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