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아메리칸 드림의 필요 조건

입력
2018.07.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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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가족과 함께 참석한 추신수. USA투데이스포츠 연합뉴스
지난 18일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가족과 함께 참석한 추신수. USA투데이스포츠 연합뉴스

얼마 전 메이저리거 추신수(텍사스)의 영어 실력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한국인 타자 처음으로 ‘별들의 잔치’인 올스타전에 초대된 그는 “야구 신(baseball god)의 선물”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수십 명의 기자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의 영웅이 됐다는 평가에 그는 “너무 과하다”며 “아직 내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이다. 나는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더 높은 목표를 내세웠다.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답하는 모습 자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자 추신수는 “처음 미국에 왔던 18세 때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처음 몇 년간 통역에 의존했지만 그 후엔 통역 없이 동료들과 부딪치고 함께 어울리면서 직접 배웠다”고 영어 실력 향상의 비결을 영어로 전했다.

종목을 불문하고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장벽은 언어다. 고교 졸업 후 미국 마이너리그에 진출한 한 야구 선수는 “영어를 못하다 보니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텅 빈 방안에서 벽을 보고 혼잣말을 한 적도 있다”며 외로움을 호소했다. 지난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데뷔한 박성현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영어 할 때마다 살고 싶지가 않다"는 푸념을 올렸다. 영어 실력에 대한 회의였지만 정작 주변에선 상당한 수준이라고 전한다. 언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운동 선수가 영어를 잘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하루 종일 훈련만 해도 세계 최고 선수들을 따라가기 벅찰 텐데. 박찬호, 박지성, 김연아, 박인비 등 세계를 정복한 선수들의 공통점은 언어 정복이었다. 박찬호는 미국 데뷔 초창기 마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멸시당한 이후 치즈와 햄버거만 먹으면서 완전 ‘미국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영어 단어와 문장을 매일 한 개씩 외워 다음날 선수들에게 써 먹는 방법으로 영어를 습득한 일화를 과거 공개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 처음 진출했을 때 캐나다인을 영어 과외교사로 고용해 ‘열공’을 했던 최나연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영어를 잘 못해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 뒤로 마음이 편해졌고 골프도 더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가 된 추신수가 류현진(LA 다저스) 등 태평양을 건너온 후배들에게 “하루빨리 영어를 배우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리는 ‘미국 생활을 오래했으니 그 정도 영어는 하겠지’라고 생각하지만 일반인도 성인이 된 이후에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언어다. 친구와 영어로만 대화하고 미국 드라마를 보는 방법으로 영어를 마스터 중이라는 정현은 “영어를 배우고 테니스 실력을 키우는 것이 50대 50으로 똑같이 어렵다”고 했다.

얼마 전 프로야구 LG 출신의 이종열 SBS스포츠 프로야구 해설위원을 만나 어려웠던 미국 유학 경험을 들었다. 선수 은퇴 후 몇 년 전 미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그는 “학창시절에 학교를 다녔지만 하지 못했던 공부, 더구나 영어 공부는 나에게 너무나 벅찬 과정이었다”고 떠올렸다. 어학 연수가 아니라 야구 공부를 하기 위해 간 곳이었지만 언어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지 생활 10년이 지나도 영어를 못 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전인지는 미국에 진출한 지 1년도 채 안됐던 2016년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영어로 유창하게 우승 소감을 밝혀 화제가 됐다.

의지의 문제다. 정현은 호주오픈 때 인터뷰에서 “경기장에서 나를 응원하는 친지들이 너무 많다"고 했을 때 ‘too many’가 아니라 ‘too much’라 하는 등 ‘원어민 수준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진 못했다. 김세영은 3년 전 LPGA 투어 데뷔 석 달 만에 우승했을 때 ‘무데뽀 영어’로 인터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영어 실력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영어까지 하는 운동선수’ 만으로 ‘갑’이다. 관중과 기자는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서툴더라도 외국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성환희 스포츠부 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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