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중석불사건(7.18)

입력
2018.07.18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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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오늘 이승만 정권 외화 착복 사건인 '중석불사건' 국회 조사단이 출범했다. 사진은 중석(텅스텐) 선광장이 있던 강원 영월 상동광산.
1952년 오늘 이승만 정권 외화 착복 사건인 '중석불사건' 국회 조사단이 출범했다. 사진은 중석(텅스텐) 선광장이 있던 강원 영월 상동광산.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대표적인 게 국방비 착복으로 9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1951년의 국민방위군 사건과 이승만 재선을 위한 부산정치파동(1952.5), 재선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1952년 3~7월의 이른바 ‘중석불 사건’이다.

중석불(重石弗)이란 중석(텅스텐)을 수출해서 번 달러라는 의미로, 외화가 귀하던 당시 종교불(기독교 선교ㆍ구호자금) 원조불(차관 달러) 같은 말과 함께 통용됐다. 중금속 텅스텐은 녹는 점이 높아 포신 등 무기 재료로 귀하게 쓰이던 금속. 미국은 텅스텐 주요 조달국이던 중국이 공산화하자 52년 3월 한국과 협정을 체결, 2년간 1만5,000톤을 수입하는 조건으로 350만달러를 선금으로 건넸다. 그해 국영기업 ‘대한중석’이 설립됐고, 전시 이승만 정부는 그 돈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외화는 산업자재 수입에만 쓸 수 있도록 제한돼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규정을 바꿔 대통령이 인가하면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재무부는 그 달러를 14개 무역회사에 당시 환시세(1만2,000대 1)의 반값(6,000대 1)에 불하,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도록 했다. 거기다 정부 보유불 120만달러도 얹어 10개 기업에 불하했다. 산업을 키우려면 중석을 캐야 하고, 중석을 캐려면 광부들이 잘 먹어야 한다는 게 당시 재무부의 명분이었다. 무역상들은 수입 밀가루와 비료를 규정가보다 3~4배 비싸게 시중에 유통시켜, 환차익에 더해 최대 5배의 폭리를 취했다. 그 수익 중 얼마가 이승만 정부의 정치자금으로 흡수됐는지는 알 수 없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야당은 1952년 7월 18일 국회 특별조사단을 꾸려 진상 조사에 나섰다. 조사단은 업자들이 환차익으로 505억원, 가격 조작으로 265억원 등 최소 770억원의 부당 이득을 챙겼다고 밝혔고, 당시 법무부는 상사 대표 등 관련자들을 군정법(폭리취체령)과 양곡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그들은 전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태 책임은 농산부가 떠맡아 장ㆍ차관과 양곡국장이 경질됐고, 정작 기획을 주도한 재무부 장관(백두진)은 이듬해 국무총리가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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