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360°] “죽는 것이 효도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입력
2018.07.14 14:00
수정
2018.07.14 17:30
구독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와 안중근(1879~1910) 의사.한국일보 자료사진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와 안중근(1879~1910) 의사.한국일보 자료사진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유난히 길었던 1910년 겨울, 어머니는 때 아닌 여름 옷감을 꺼냈다. 아들이 입을 수의를 짓기 위함이었다. 3년 전, 국경을 넘어 대륙으로 간 아들은 사형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죄명은 살인. 그의 총구가 겨냥한 것은 힘없는 조국의 주권을 훔친 원수, 이토 히로부미(1841~1909)였다.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안중근은 결국 항소를 포기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 어머니의 전언대로 의연히 죽기로 결심한 그 때,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절대로 삶을 구걸하지 말라던 어머니와 그 뜻을 따른 아들을 두고 적국의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시모시자(是母是子)’. (아사히 신문, 1910)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안중근이라는 거대한 이름에 가려진 뿌리, 조마리아는 지사의 어머니이자 지사였던 시대의 여걸이었다.

순국하기 5분 전의 안중근 의사 모습. 안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에서 한국의 안중근함 장병들이 헌화한 뒤 경례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순국하기 5분 전의 안중근 의사 모습. 안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에서 한국의 안중근함 장병들이 헌화한 뒤 경례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중근아, 글보다 활이 좋다면 그리 하여라” 

사서오경을 펼치기 전에 활부터 들었다. 글을 제법 읽을 줄 알게 된 후로는 서당으로 향하는 발길도 서서히 끊겼다. 서책을 넘기는 것보다 표적을 쫓는 것에 빠진 소년을 어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몰래 포수를 따라다니며 사냥을 익힌 아들이 제 손으로 잡은 들짐승이라도 들쳐 매고 오는 날엔 뚝딱 삶아내 모두가 함께 먹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조마리아는 아들 중근이 황해도의 너른 산과 들을 누비도록 풀어두었다. 회초리로 엄히 다스려 서책 앞에 주저앉히는 것만이 어머니의 도리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남다른 어머니 덕에 아들은 저격수의 자질을 기를 수 있었다. 반면, 글을 익히는 데 두각을 보였던 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는 책을 읽혔다. 아이가 타고 난 기질을 거스르지 않았던 슬기로운 양육법이었다.

조마리아는 현명한 어머니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항일 투쟁의 전면으로 나섰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옭아매고자 거액의 차관을 강제로 들이밀었고 나라는 빚더미에 앉았다. 그는 아들 중근이 적극 가담한 국채보상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여자는 나라의 백성이 아닌가?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패물은 무엇에 쓰리오.” 패물까지 팔아 나라 빚을 갚는 데 보태고자 하는 여성들이 움직이자 온 나라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은가락지부터 은장도, 은투호노리개는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었다. 한치 앞을 모르는 혼란의 시대, 식솔들의 생명줄이 될 요긴한 것이었다. 하지만 없는 살림을 털어 보내는 것만으로는 나날이 조여오는 일제와 맞서기엔 부족했다. 국채보상운동 최전선에서 힘을 쏟던 맏아들 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떠날 결심을 알려온다. “집안일은 생각지 않아도 된다. 최후까지 싸워라.” 어머니는 단호하게 아들을 보냈고, 아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뤼순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이 가족들과 면회를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뤼순 감옥에 수감된 안중근이 가족들과 면회를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공.

 

 “독립 운동을 한다는 놈들이 엎드리기만 할 것이냐” 

그가 잃은 것은 맏아들 하나뿐이 아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마자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은 공모자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간신히 풀려난 아들들과 함께 끊임없이 타국을 떠돌 때, 중근이 남기고 간 일곱 살 난 손자마저 잃었다. 안중근 가족을 끈질기게 쫓은 한 밀정이 건넨 과자 속엔 독이 들어 있었다. 아이는 타인의 호의를 의심할 줄 모르는 나이였다. “어머니, 자식의 막심한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아들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기를 희망합니다. 후일에도 잊지 마옵시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 주시오.” 천주교의 교리에 반하는 죄를 지은 바, 자식만큼은 평생 신의 은총 속에서 살기를 바랐던 안중근의 유언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 됐다.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잃었지만 그는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졌다. 식솔들이 일제의 위협을 피할 곳을 찾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으로 110㎞ 떨어진 낯선 땅에 간신히 정착했다. 춥고 척박했지만, 오히려 그 거친 땅은 여사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독립운동의 무대가 됐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쉬는 날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동포들을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자)

이미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거대한 대륙을 누비는 고행길에 맹수와 산적이 끊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 사납게 아가리를 벌리는 짐승들 앞에서도 조마리아는 대담했다. “같이 가던 청년들 수십 명이 땅에 엎드려 꼼짝 못할 정도였죠. 이 때 여사께서 내려오더니 ‘이놈들아, 독립운동 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할거냐?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 라고 대갈일성을 했다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정화암) 마부를 밀쳐내고 스스로 고삐를 쥔 조마리아는 벼락처럼 소리쳤다.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 내지르듯 달려나간 마차가 적들의 혼을 빼놓아 결국엔 모두가 무사했다는 후문. 당시 여사를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독립운동가 이강이 ‘범을 낳은 범, 세상에 다시 없을 여걸’이라 회상할 만했다.

조마리아 여사의 생전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조마리아 여사의 생전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아무도 지켜주지 못한 조마리아의 후손들 

그가 임시정부 터가 잡힌 상하이로 이주한 것은 1920년. 어지러운 시대였던 만큼, 다툼도 잦았던 곳에서 그는 어른이자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쉽게 다루는 일이 없고, 누구의 말이든 반드시 끝까지 들었던 그는 곧 김구를 비롯한 현지 운동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아들을 조국에 바쳤듯이 자신의 인생 또한 그 앞에 헌신했다. 손주들이 돈이 없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는 궁핍한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돈을 모아 임시정부에 헌납했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사력을 다한 탓이었을까. 조마리아는 1927년 7월 15일, 암투병 중 66세의 나이로 타국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남은 자식들은 어땠을까. 김구를 도와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던 넷째 안공근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충칭에서 암살당했고, 독립군단을 통합시켰던 셋째 안정근은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채 상하이에서 객사했다. 딸 안성녀는 몰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입히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연구자들의 무관심 속에 아직까지 독립 유공 서훈을 받지 못했다. 5대째에 이르러 수백 명 가까이 불어난 후손들은 몰락의 길을 걷다 뿔뿔이 흩어졌다. 해방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죠.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놈들이 권력을 잡아 그 때와 다를 것 없습니다” (안중근의 조카 민생이 사촌 동생 경옥에게 보낸 편지) 해방된 조국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이들은 국경 너머 북으로, 바다 건너 미국으로 건너가 영영 소식이 끊어졌다.

조마리아의 유해는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지에 묻혔으나 지금은 무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도시개발로 묘지를 갈아내고 건물을 세우며 사라진 탓이다. ‘하얼빈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아들 안중근의 유해 또한 중국 땅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15일은 조마리아 여사가 세상을 뜬 지 91년이 되는 날. 어머니의 혼도, 아들의 혼도, 그 후손들의 삶도 제대로 보듬지 못한 우리에게는 여전히 부끄럽기만 한 날이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