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가시밭길 걸을 그들에게 징검돌 놓이길

입력
2018.07.13 04:40
22면
징검다리. 이마주 제공
징검다리. 이마주 제공

징검다리

마그리트 루어스 글ㆍ니자르 알리 바드르 아트워크 사진ㆍ이상희 옮김

이마주 발행ㆍ44쪽ㆍ9500원

돌멩이 그림이 단숨에 눈을 사로잡는다. 크고 작은 조약돌을 총총 놓아 만든 그림이다. 등짐을 진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간다. 짐이 무거워 다들 고개가 꺾였다. 푹 숙인 머리, 구부정한 어깨, 어깨를 짓누르는 짐, 짐 꾸러미를 떠받치는 손, 힘겹게 떼어놓는 발, 모두 다 돌멩이다. 오랜 세월 물살에 씻기고 깎여 모난 곳 없는 돌멩이는 둥글고 길쭉하고 납작하고 도톰하며 희고 푸르고 붉고 누르고 무늬져 있다. 햇살 가득한 뜰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소꿉놀이하고 공기놀이하는 아이의 고사리손에 어울리는 조약돌, 그 예쁜 조약돌이 모여 목숨을 건 피란길에 오른 고단한 사람들이 되었다. ‘어느 난민 가족의 여행’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림책 ‘징검다리’다.

“그다지 오래지 않은 어린 시절,” 라마는 아침이면 얼른 일어나라고 성화를 부리는 수탉 울음에 눈을 떴다. 따뜻한 침대에서 뒹굴며 엄마가 아침밥 차리느라 달각대는 소리를 들었다. 빵과 새콤한 요구르트와 뜰에서 갓 딴 빨간 토마토로 차린 소박한 아침은 얼마나 맛있었던가. 낮에는 동생과 친구들과 햇볕이 쨍쨍 달군 자갈밭과 모래톱에서 깔깔대며 뛰어놀았고, 저녁에는 오렌지나무 밑에서 어른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우리가 고른 기도문으로 기도하지 못”해도, 아이들은 뛰어놀고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들에 나가 일하고 바다에서 고기를 낚았다.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고 이웃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콩알만 한 조약돌 백여 개로 만든 수탉이 앙증맞다. 하얀 조약돌, 연회색과 연분홍빛 조약돌로 꾸민 나무 그늘 밑 가족은 평화롭고 다정하다. 머리에 한가득 짐을 이고 장에서 돌아오는 진갈색 여인들은 어쩐지 박수근이 그린 여인들을 닮았다. 국민의 반이 난민이 되어 떠도는 나라, 시리아의 작가 니자르 알리 바드르는 전쟁터가 되어버린 조국의 바닷가 조약돌로 우리가 ‘난민’이라 부르는 이들이 잃어버린 삶을 꼼꼼하게 재현한다.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진다. 그럭저럭 평화롭던 일상이 꿈처럼 사라진다. 총과 폭탄과 공포와 굶주림을 피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집을 떠난다.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곳, 시장에 가다가 죽는 일이 생기지 않는 곳”을 찾아, 나고 자라 늙어 죽을 것을 의심치 않던 땅과 살가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 이제 라마는 아침마다 잠을 깨워주던 수탉과 뜰에 핀 꽃과 오순도순 모여앉아 옛날이야기를 듣던 오렌지나무 그늘과 삐걱거리던 문과 포근한 침대와 “우리가 집이라 불렀던 땅”을, 정다운 이웃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전쟁터의 돌멩이들이 걷는다. 아이를 업고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걷는다. 지치고 지쳐 울음조차 나오지 않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작은 보트에 몸을 싣는다. 모두를 무사히 보내줄 리 없는 가혹한 바다를 건넌다. 기근을 피해, 일제의 수탈과 압제를 피해 두만강을 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를 떠돌던 우리처럼, 한국전쟁으로 모두가 난민이 되었던 우리처럼, 전쟁고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낯선 땅, 낯선 사람들 곁으로 떠난 우리처럼 바다를 건넌다.

이들 앞에 꽃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을 이들 앞에 발 디딜 만한 징검돌이 놓이길. 작고 울퉁불퉁하고 띄엄띄엄 놓여도 결국은 그럭저럭 건널 만한 징검다리가 언제나 함께 하길.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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