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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은 제국주의 일본이 이 땅에 남긴 대표적인 긍정적 유산의 하나일지 모른다. 1435mm 표준궤로 경의선을 통해 중국 철도와 이어진다. 그런데 철도 대부분이 1067mm 협궤인 일본의 기업이 깐 철도가 왜 표준궤인지 모르는 이가 많다. 전문가도 ‘대륙 침략을 선도하는 맥관(脈管)’ 등으로 푼다. 잘 보면 배경에 표준궤 미국 철도를 일찍 맛본 이하영과 일본인 기사 가사이 아이지로(笠井愛次郞)의 우직한 철도사랑이 있다. 전자가 철도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반면 후자는 거의 무명이다. 궤간은 선로간 최단거리로 레일 상단으로부터 아래쪽 14mm 부분이 기준이다.

철도가 관심을 끈 것은 1877년 수신사 김기수의 ‘일동기유’에 소개된 일본철도 시승기, 1882년 광산 개발 이권과 연관지은 외국기업의 철도부설권 양도 요구 이후다. 일본 철도는 1872년 개통하여 영국보다 47년 늦지만 동양에선 1853년 인도 다음이다. 대장성 차관과 국장이던 30세 전후의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토 히로부미가 영국 자본을 끌어들여 반대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을 설득시켜 건설한다. 오쿠마는 훗날 협궤 채택을 자책한다.

고종은 통역으로 있다 주미 대리공사로 1년 넘게 체재한 이하영이 가져온 철도모형을 보고 철도 지식을 키운다. 이하영은 몰락 양반가 자제로 한학을 배우지 못했으나 일인 가게에서 일하고 의료 선교사 알렌(H.Allen)과 미 공사관에서 일하면서 일어와 영어를 익힌다. 27세 때 관료 재교육기관의 외국어 교사를 거쳐 박정양, 이완용, 이상재와 함께 신설된 재미 공사관에 파견된다. 철도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그는 귀국 시 철도 관련 토목ㆍ열차 설계 정보까지 갖고 온다.

1901년 8월 착공된 경부선의 세부안은 1894년 7~8월에 만들어지는데, 이는 무쓰 무네미쓰 외상이 기업가 다케우치 쓰나를 파견해 경인선과 함께 준비토록 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8월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에게 조선 내정 개혁을 담은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케 하는데, 2항에 일본 정부나 기업에 의한 두 노선의 가급적 조속한 기공이 규정된다. 이 무렵 일본은 5월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군대를 파견해 7월 경복궁 점거 후 대원군ㆍ김홍집 친일정권을 수립한다.

조선조정이 1898년 9월 합동조약을 체결하여 경부철도(주)에 부설권을 줄 때 궤간을 1896년 3월 허가한 경인선 궤간으로 정한다. 그런데 국내철도규칙 3조가 1897년 1월 시베리아 철도 규격인 1520mm 광궤로 바뀐다. 1년여 아관파천기에 러 공사 웨베르(K.Waeber)가 손을 쓴 결과다. 이때의 대응이 가토 마스오 공사가 오쿠마 외상에게 보낸 9월 20일자 외교 전문에 나와 있다.

“러 공사 마투닌(N.Matunin) 광궤 주장... 본인은 협궤 제의... 조선조정 반대... 치우치지 않도록(국내철도 규격 일정케 하여 상호통행 지장 없어야 한다는 철도규칙 2조 인용) 경인선과 같게 규정... 우리 입장에서 광궤는 회사에 비경제적, 경인선이 우리 것이고 장차 소유할 경부선을 같은 궤로 하면 이익”으로 이어진다.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J.Morse)에의 경인선 부설 허가와 7월 제정 철도규칙의 표준궤 채택에 큰 역할을 한 이하영의 업적이 빛나는 순간이다.

가사이는 경부철도 설립 후 착공된 시점인 1901년 6~8월 전후하여 활약한다. 재정 지원을 최소화하려는 훗날 철도성의 철도작업국, 예견되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조기 완공을 바라는 육군이 개입하여 1미터궤나 협궤를 주문한다. 이때 가사이 기사장이 시부사와 에이이치 회장에게 경제적, 군사적 이득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호소한다. “이 철도는 장래 중국·유럽 대륙 철도와 연결되어 세계교통의 간선으로 기능해야 할 철도다. 식민지 철도로 봐서는 안 된다. 어떤 어려움에도 표준궤를 지켜야 한다” 면서 대승적 차원과 민중의 눈높이 접근을 강조한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가가 높던 시부사와는 가사이의 말에 공감하여, 회사 내부 방침을 정하고 관료와 육군측 요인을 만나 설득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합동조약 위반에 따른 외교 마찰, 러일전쟁 승리 시 대륙 진출 용이 등이 거론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때의 결정으로 우리 철도 역사의 품격이 한 단계 높아진다. 협궤였다면 개통이 1905년 1월보다 빨라져 1904년 2월 터진 러일전쟁에 더 쓸모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 철도와 단절된 한반도 철도는 철도사에서 두고두고 실격의 역사 장면 하나로 거론되었을 것이다.

고종의 총애로 주일 공사ㆍ대사, 외무대신을 지낸 이하영은 친일파 거두로 지목되어 일부 긍정적 업적까지 폄하되고, 가사이는 ‘표준궤는 대륙 침략의 발판’이라는 단견에 묻혀 아예 조명받지 못한다(가사이 추가 정보, 한국철도견문록 2012, 91쪽). 20세기 여명기를 전후하여 한ㆍ러ㆍ일 간에 긴박하게 전개된 경부선 궤간 밀당의 전말을 돌아보았다. 표준궤 공로자에 대한 공과를 가린 평가, 지금대로 좋을까.

배준호 전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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