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의 식물과 인간] 무궁화

입력
2018.06.05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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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를 국가의 상징의 표상으로 삼는 이유는 나라 정신을 간직하고 높이는 데 있다. 무궁화(無窮花)가 우리나라 꽃으로 공인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각별하다. 무궁화 꽃 하나하나는 하루 만에 단명(短命)을 하지만, 나무 전체로 볼 때는 끊임없이 새로 피고 새로 이어 피기 때문에 무궁한 영화의 나무로 보았다.

무궁화는 7월부터 10월까지 100여 일 동안 화려하게 끊임없이 피고 진다. 하루에 보통 작은 나무는 50여 송이 정도의 꽃이 피므로 100여 일 동안 피운 꽃을 합하면 한 해에 2,000~5,000여 송이의 꽃을 피운다. 아침에 햇빛을 받을 때 온 생명을 다해 피고, 해가 지면 꽃이 떨어진다. 무궁화의 흰 꽃은 무구청정(無垢淸淨)을, 진홍빛의 화심(花心)은 태양처럼 붉고 뜨거운 마음을 나타낸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國花)로 공고되기까지는 사연이 많았다. 일제는 무궁화를 민족 말살 정책으로 모조리 뽑아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런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로 굳어진 것은 1907년 윤치호가 애국가 후렴에서 부를 때부터였다. 동아일보에서 1925년 10월 25일 ‘조선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칼럼을 썼고, 안창호가 국수(國粹) 운동을 일으킬 때 무궁화를 국화로 주장한 덕분이다. 황성신문은 구한말 나라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던 당시 무궁화는 국화로서 마땅치 않으니 복숭아꽃으로 바꿔야 한다 하여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정부수립 후에 국가의 국기봉도 무궁화가 되었지만 논란은 계속되었다. 6ㆍ25전쟁 이후 무궁화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자라지 않는다 하여 논란은 계속되었고 나라 꽃으로 적합지에 관한 시비가 일어나 1956년에는 식물학자ㆍ교수ㆍ언론사 별로 지상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래 무궁화의 한자어는 무궁화가 아닌 ‘목근화(木槿花)’이다. 무궁화의 순수한 우리말은 남쪽 해안지방에서는 ‘무강나무’, 또는 ‘무게꽃’이라 부른다. 무궁화의 이름도 많다. 햇빛에 따라 있게 된다 하여 ‘일급(日及)’, 조선시대 아이들이 꽃을 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손을 대면 학질에 걸린다고 한데서 ‘학질꽃’, 울타리 꽃이라 하여 ‘번리초(藩籬草)’라 불렀다.

조선시대 강희안은 화암구품에서 무궁화를 9품에 넣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하사 하여 꽂는 어사화(御史花)와 신하들이 꽂은 진찬화가 무궁화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나라 최고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은 우리나라 발전과 안전 보장에 뚜렷한 공이 있는 대통령과 우방 원수에게 수여하고 있다.

무궁화는 식용, 약용, 관상용, 정원수로 가치가 높다. 어린잎은 나물을 해 먹거나 차(茶)로 대용한다. 꽃이 활짝 피기 전에 채취하여 꽃술을 버리고 그늘에 말려 쓴다. 말린 꽃잎을 은은한 물에 달여 마시거나 꽃을 약간 볶아 곱게 가루를 내어 사용하기도 한다. 궁중에서 꽃봉오리를 쪄서 향신료와 간장으로 맛을 내어 먹었다.

우리 민족은 무궁화의 높은 기품과 훌륭한 면모 때문에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 동안 전국적으로 무궁화를 심기 운동이 꾸준히 전개된 덕택인지 지금은 무궁화 없는 곳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무궁화는 나라 꽃으로 관심이 많아 수없이 많은 품종들이 개발되어 지금은 200여 종이나 된다. 우리의 삶도 무궁화처럼 나날이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일신지미(日新之美)’처럼 살면서 우리 문화의 고유 유산인 숲과 나무를 보존해야 할 것이다.

정구영 식물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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