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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나 죽을 곳’을 지칭하는 일본어는 ‘시니바쇼(死に場所)’다. 15~16세기 전국시대 일본무사들에겐 시니바쇼를 얻는 것이 영광이 될 만큼 큰 관심사였다. 마땅한 단어는 없지만 우리도 망자에 대해 ‘적당한 때 잘 죽었다’ ‘값있는 죽음이다’는 표현을 쓴다.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거나 의미있게 생을 마감한 경우에 사용한다. 안중근에게 암살된 68세의 이토 히로부미가 전자라면 31세로 순국한 안 의사는 후자다.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인 이들은 자국에서 존경받는 인사로 지사 경력이 있다.

지사의 역할은 시대와 나라의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 안중근은 20세기 초 조국을 풍전등화 상태로 만든 침략국 일본의 원흉을 처단하여 민족의 기상을 높이고 정기를 고취시킨다. 이토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인 1862년 12월의 영국공사관 방화 등 구 막번체제 타도에 진력한다. 지사로 생을 마친 안 의사와 달리 유신 후 정치가로 변신한 그는 메이지 일본의 열강 진입을 선두에서 이끈다.

시니바쇼는 지사의 사후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안 의사보다 이른 1860~70년대 생 국내 지사 중 73세 때 암살된 김구의 평가가 제 명을 산 윤치호, 이승만보다 좋다. 1830~40년대 생 일본 지사 중 20대에 죽은 요시다 쇼인,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는 이토 이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반면 국군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며 원로의 한 축으로 큰 권세를 누리다 84세에 떠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평가는 별로다. 그는 생전 “이토는 끝까지 운이 좋아, 죽을 곳을 얻은 그가 부럽다”고 했다.

자국 내 존경도로 치면 안중근이 이토 이상일지 모른다. 우리 역사에는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이웃 나라 요인을 내국인이 국외에서 살해한 사례가 거의 없다. 그의 업적이 빛을 발하는 이유다. 이에 비해 일본사에선 이토 정도의 업적을 남긴 정치가와 군인이 시대별로 적지 않다. 오늘날 평가가 높은 안 의사의 삶이지만 그의 선택은 궁지에 몰린 끝에 택한 불가피한 결과일 수 있다. 그도 민중의 눈높이에 맞는 평범한 삶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항일투쟁에 몸담기 전의 행적에서 낌새를 감지할 수 있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 의사는 조부가 진해 현감, 부친이 진사인 양반가로 금수저 출신이다. 사냥의 명사수로 알려져 16세 때 산포(山砲)군의 일원으로 부친과 함께 동학혁명군 진압에 참가한다. 악정에 분기한 농민 중 그의 총에 희생된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후 20대에 천주교회 총대와 만인계 채표회사 사장, 석탄상회ㆍ삼흥학교ㆍ돈의학교 경영자로 활동한다. 대부분 가문과 재산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들이다.

인생의 전환점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은 1907년의 28세 때다. 항일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북간도로 넘어가 의병단을 조직하여 김두성 총독, 이범윤 대장 휘하에서 활동한다. 일본군과의 전투 패배 후 러시아 동부지역에서 항일 세력의 조직과 양성에 힘쓴다. 이토 암살은 1909년 3월 2일 단지회 모임에서 엄인섭, 김태훈 등과 함께 기획한다. 7개월 뒤 거사 후 안중근과 일가 친족은 예상대로 가혹한 응징과 오랜 시련의 날들을 보낸다. 오늘날 안 의사 가문은 일부 자녀의 친일행위 등이 비판받지만 십 수명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배출한 명가로 평가가 높다.

흉내내기 힘든 안중근의 삶과 달리 이토의 삶은 우리 청장년층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집안은 양반인 안 의사와 달리 농민으로 아버지 때 간신히 최하급 무사가 된다. 그런데 번의 열린 교육체계와 번주 등의 배려로 영국 유학을 다녀와 인재로 발탁된다. 지사로서의 실적은 요시다ㆍ구사카ㆍ다카스기만 못하지만 이들의 요절로 유신 원훈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주목을 받는다. 인덕과 영어가 무기인 이토는 내무, 공부(工部) 분야를 맡다가 원훈들이 사라진 1878년부터 최유력 정치가로 부상한다.

이토는 일대에 자수성가하여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만 청렴하게 살아 유족이 대한제국과 일본 왕실의 금전적 지원을 받기도 한다. 야마가타가 큰 저택에서 계파 정치가와 군인 다수를 거느리며 위세를 떨친 것과 대조된다. 국내에서 원흉 이미지가 강한 그는 당대 정치가 중 야마가타,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 군출신 정치가보다 온건한 한반도 통치 구상을 지녔다. 그의 부재로 식민통치가 앞당겨졌다고 보는 시각이 많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의 하얼빈역 의거는, 국권피탈이라는 실격의 역사로 그 역사적 의의가 한동안 조명받지 못하지만 해방 후 국내는 물론 중ㆍ일에서도 강한 빛을 발한다. 그날의 의거는 한반도 국가 역사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준 대사건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관련하여 정치지도자들은 청장년 다수가 의연한 삶을 추구하는 안중근형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청운의 꿈을 펼쳐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이토형의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나라 운영에 힘써야 할 것이다.

배준호 전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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