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은 선거 중] “낙태 권리 인정하라” 낙태 금지 조항 폐기로 기우는 아일랜드 민심

입력
2018.07.09 14:5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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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5일 ‘임신중절’ 국민투표

엄격한 가톨릭 국가 전통 따라

성폭력 피해자도 낙태 예외 안 돼

헌법에 ‘태아 권리=엄마 살 권리’

# 1980년대 이후 해외 낙태 17만명

“헌법 조항으로 낙태 안 사라져”

유지파 “효율적 살인 안 돼” 주장

# 여론 63%는 임신중절 허용 원해

총리 “안전한 의료시스템 도입”

폐기 땐 초기 12주 중절 허용할 듯

지난달 12일 한 여성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낙태 금지 헌법 조항을 폐기하라'라고 쓰인 현수막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민들은 5월 25일 해당 조항을 폐기할 지 여부를 투표로 정하게 된다. 더블린=로이터 연합뉴스
지난달 12일 한 여성이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낙태 금지 헌법 조항을 폐기하라'라고 쓰인 현수막을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민들은 5월 25일 해당 조항을 폐기할 지 여부를 투표로 정하게 된다. 더블린=로이터 연합뉴스

아일랜드에서는 사실상 임신중절(낙태)을 할 수 없다. 가톨릭 전통이 유구하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낙태가 죄악시 됐고 1861년부터는 아예 공식적으로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게다가 1983년에는 아예 헌법에 ‘태아의 권리’를 엄마의 ‘살 권리’와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헌법 40조 3항 3절이 바로 그 조항이다.

아일랜드 국민들은 5월 25일 이 조항을 폐기할 것인가를 놓고 국민투표를 벌인다. 아일랜드가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낙태로 금할 정도로 낙태에 엄격한 가톨릭 국가이기 때문에 외신들도 이번 국민투표를 ‘역사적인 일’로 규정, 아일랜드 국민들의 선택에 주목하고 있다.

낙태 금지 조항 폐기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해당 조항이 낙태를 막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일랜드에서 낙태 수술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은 해외로 나가게 되고, 해외에 나가 수술을 할 비용조차 없는 여성들은 의사의 처방전이 없는 낙태 약을 복용해 목숨을 위협 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항 폐기 찬성 운동을 벌이고 있는 배우 겸 코미디언 타라 플린은 “내 몸은 뇌가 판단하기 전에 낙태가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네덜란드에서 낙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며 “나는 태아가 살아 숨쉬는 사람과 동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1980년대 이후 해외로 나가 낙태 수술을 받은 아일랜드 여성은 17만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매일 9명의 아일랜드 여성이 영국으로 떠나고, 4명이 인터넷에서 낙태 약을 사 먹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고, BBC는 “2016년 영국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 중 소재지가 아일랜드였던 이들은 3,265명이었다”고 덧붙였다.

페이스북에서는 낙태 수술을 경험한 아일랜드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낙태금지법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8세 때 영국으로 건너 가 수술을 받았다는 한 여성은 ‘그녀의 입장에서’라는 간판을 단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아픈 부모님을 돌봐야 했고, 월급도 적은 터라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다”며 “이 조항이 있다고 아일랜드에서 낙태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여성은 “18세 때 임신을 하게 됐는데, 남자친구는 임신 사실을 알리자 연락이 두절됐다”며 “가난한 여성들이 낙태 수술을 받으러 영국에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제발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말자”고 호소했다.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다. 헌법 조항 폐기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아일랜드에서 낙태를 꾸준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 낙태 건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1년 영국으로 건너 가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이 6,600여명에 달했는데, 2006년부터는 절반 수준인 3,000명으로 떨어졌다는 것.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니암 유이 브리아인은 “찬성 투표를 하는 것은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실수가 될 것”이라며 “해당 헌법 조항을 폐기하는 것은 살인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게 하는 길을 열어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낙태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지난 3월 8일 더블린에서 ‘내 몸은 내가 선택한다’ ‘불필요한 낙태 원정을 만들지 말라’는 내용 등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더블린=로이터 연합뉴스
낙태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일랜드 시민들이 지난 3월 8일 더블린에서 ‘내 몸은 내가 선택한다’ ‘불필요한 낙태 원정을 만들지 말라’는 내용 등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더블린=로이터 연합뉴스

전체적인 여론은 일단 낙태 금지 조항을 폐기하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운 상태다. 시장조사업체 칸타밀워드브라운이 지난 2월 6~14일 사이 97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3%가 해당 조항을 폐기하는 데 찬성한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실제 국민투표에서도 찬성 비율이 높게 나오면, 아일랜드 정부는 임신 초기 12주 내에는 아무 제약 없이 낙태를 허용하는 방안을 입법화할 예정이다. 임신 초기 낙태 허용안에 대해서는 48%가 찬성했고, 33%가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낙태금지법을 폐지 운동은 2012년 아일랜드에서 살던 인도계 여성이 낙태를 거부 당해 끝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주목을 얻었다. 당시 31세 치과 의사였던 사비타 할라파나바르는 심각한 요통을 호소하며 낙태를 요청했지만,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된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낙태를 거부당해 다음날 패혈증성 쇼크로 사망했다.

시민들은 ‘그녀의 심장도 뛰고 있었다’며 시위를 벌였고, 그 여파로 2013년 엄마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에는 극히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입법이 이뤄졌다. 할라파나바르의 아버지인 안다나파 얄라기는 아이리시타임스에 “내 딸은 헌법 조항 때문에 낙태를 할 수 없었고 목숨을 잃었다”며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일랜드 사람, 아일랜드 여성들을 위해 폐기에 찬성하는 투표를 하길 희망한다”고 언급했다.

폐기에 찬성하는 입장인 레오 바라드카르 총리도 “5월25일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여성과 의사를 신뢰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할 기회를 갖게 되는 날”이라며 “찬성 투표는 안전하고 법적이며 의사 주도의 낙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0~2014년 사이 매년 평균 5,600만건의 낙태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 가운데 45%는 안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낙태를 선택하는 데에는 해당 국가의 낙태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여성이 원할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조사 대상 57개 국가에서 발생한 낙태의 87.4%는 안전하게 이뤄진 반면, 낙태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62개 국가에서 발생한 낙태의 경우 25.2%만 안전하게 진행됐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중국 등 196개국 가운데 58개국은 여성이 요청할 경우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필리핀 등 134개국은 여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 등을 조건으로 제한적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엘살바도르, 몰타, 바티칸, 칠레, 도미니카공화국, 니카라과 등 6개국은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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