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 칼럼] 코끼리를 구하더니 고래를 잡는···

입력
2018.04.17 16:16
29면

1867년 뉴욕타임스는 상아에 대한 인간들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으로 코끼리가 멸종위기에 이르렀다고 보도했다. 당시에는 단추, 상자, 피아노 건반에 이르기까지 코끼리 상아가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용처는 당구공이었다. 당구공용 상아를 조달하다가 코끼리가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코끼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 전에 적절한 대체재가 발견되어야 한다.”

1906년 오 헨리는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발표했다. 젊은 아내는 어느 상점에서 본 빗 세트에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하지만 가난한 그녀에게는 그림의 떡.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내는 자신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팔아서 남편이 소중히 여기는 금시계에 달 시곗줄을 산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그 금시계를 팔아서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빗을 산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고등학교 시절 삼중당 문고를 읽던 나는 의아했다. 그깟 빗을 사려고 금시계를 팔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같은 해 영국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은 전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전기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전기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전깃줄을 감쌀 절연체가 필요했다. 이때 사용된 것은 셀락. 셀락은 암컷 깍지벌레가 분비하는 점성 물질이다. 3만 마리의 깍지벌레가 6개월 동안 분비한 수지에서 얻을 수 있는 셀락은 겨우 1킬로그램에 불과했다. 아무리 벌레가 많아도 전기 산업의 발전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코끼리는 다행히도 이젠 멸종위기종이 아니다. 빗은 하찮은 물건이 되었으며 전깃줄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30년대에 새로운 물질이 등장했다. 베라클레이트, 폴리스티렌, 스티로폼, 나일론, 테플론, 케블라, 비닐 등 정체는 모두 달라도 플라스틱으로 통칭할 수 있는 물질이 생긴 것이다.

플라스틱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를 약속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이 났다. 제2차 대전 중 플라스틱을 군대가 독점했다. 장군에서 사병까지 모든 미군은 길이 13센티미터짜리 플라스틱 빗이 들어 있는 위생세트를 배급받았다. 박격포 퓨즈, 낙하산, 항공기 부품, 안테나 커버, 포탑, 군모 속, 원자탄 실험 등 셀 수 없는 곳에 플라스틱이 쓰였다. 전쟁 중 플라스틱 생산은 네 배로 급증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거대해진 플라스틱 산업은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호텔, 항공사, 철도 회사를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회사 이름이 찍힌 빗을 공짜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릇, 인조가죽 의자, 아크릴 전등. 비닐 랩, 비닐 속지, 쥐어짜는 병, 누름단추, 바비 인형, 운동화, 유아용 컵이 등장했다. 플라스틱은 허드렛일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었다. 문명은 석기시대와 철기시대를 지나 플라스틱 시대에 이르렀다.

상아 때문에 코끼리가 멸종할지 모른다고 걱정한 뉴욕타임스의 보도가 나온 지 딱 100년이 되던 1967년, 무명 배우 더스틴 호프만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가 발표되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미세스 로빈슨’과 ‘더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가 삽입된 바로 그 영화다. 원제는 ‘졸업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졸업’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1987년에야 처음 보았다. 영화는 세 장면에서 충격적이었다. 첫째 장면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엄마와 불륜을 저지르는 것.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우리말 자막에는 차마 엄마라고 옮기지 못하고 이모라고 나올 정도였다. 둘째 장면은 결혼식장에 난입해서 신부를 탈취하여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결말. 보는 내가 얼마나 신났던지!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셋째 장면은 영화 초반에 나온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진로를 아직 정하지 못한 남자 주인공에게 아버지의 친구가 전도유망한 직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딱 한마디로 말하면, 플라스틱이 대세야.” 이때 주인공은 이 조언이 마뜩치 않았다.

그렇다. 1967년에 이미 플라스틱은 젊은이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가능성이 아니라 단조롭고 답답하고 위선적인 미래였다. 하지만 영화가 나온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플라스틱에 빠져 있다.

지난 2월 스페인 남부 해안에서 향고래 한 마리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길이 10미터 무게 6톤의 젊은 수컷 고래의 사인은 플라스틱. 오징어를 잡아먹는 향고래 뱃속에 무려 29킬로그램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들어 있었다. 플라스틱이 위장과 창자를 막아 장 안쪽에 세균과 곰팡이가 살면서 복막염을 일으킨 것이다. 북태평양에는 한반도 16배 크기의 거대한 플라스틱 섬이 있다.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 수 없다. 플라스틱이 없으면 야생 동식물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플라스틱을 너무 많이 쓰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파트단지마다 비닐 쓰레기가 쌓이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전에 일단 줄여야 한다. 코끼리를 구한 플라스틱이 고래를 잡고 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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