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도 인터뷰] 명성교회 세습 비판 박득훈 목사 “돈에 눈먼 것 인정해야”

입력
2018.03.30 08:57
구독

“교회 커질수록 세속 권력과 가까워져

쪼개서 작아져야… ‘거리의 예수’ 본받으라”

“세상은 교회에 학을 떼는데 교회만 몰라…

한국 교회 부활하려면 돈 섬긴 것 회개해야”

지난해 명성교회 앞에서 교인들에게 ‘제발 눈을 뜨라’고 호소하며 교회 세습에 반대했던 박득훈 목사. 박 목사를 25일 서울 충정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목사는 올해 1월 정기총회에서 12년 간 맡아온 공동대표직 사의를 표해 현재는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지난해 명성교회 앞에서 교인들에게 ‘제발 눈을 뜨라’고 호소하며 교회 세습에 반대했던 박득훈 목사. 박 목사를 25일 서울 충정로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목사는 올해 1월 정기총회에서 12년 간 맡아온 공동대표직 사의를 표해 현재는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요한계시록 3장에는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얼마나 고약하고 역겨웠으면 토할 지경이었을까. 부가 커진 만큼 신앙은 ‘미지근’해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의 질타였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였던 박득훈(66) 목사는 오늘날 대형교회의 모습을 그 라오디게아 교회에 빗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한편으론 돈의 신 ‘맘몬’을 섬기죠. ‘하나님, 사랑해요!’ 해놓고 ‘돈도 사랑해요!!’ 하는 꼴인 겁니다.”

지난해 10월, 박 목사는 서울 강동구 명성교회 앞에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절규했다. “명성교회 성도들이여, 제발 부탁합니다. 눈을 뜨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자기 아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교회를 세습하려는 것을 보시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그 목청이 눈물로 젖어있었다. 명성교회는 등록 교인 수만 10만 명에 달하는 ‘메가 처치’다. 1년 예산이 1,000억 원대, 웬만한 기업만큼 커진 교회는 아버지 김삼환 목사에게서,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물려졌다. ‘부자(富者) 세습’이 된 ‘부자(父子) 세습’이다.

그래도 눈물이 날 것까진 없을 것 같았다. 그 비판에 왜 울음이 섞여 있을까 궁금했다. 당시 심정을 묻자 박 목사가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 얘기를 꺼낸 것이다.

“슬픈 거죠. 하나님이 사랑으로 세운 교회가, 또 예수님이 자신을 완전히 던져 시작된 공동체가, 썩어가고 부패 하는 걸 보실 때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그는 ‘거리의 목사’다. 가깝게는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사태’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에 그가 있었다. 한국 개신교회에 찌든 자본주의의 때를 경제정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대형교회들의 대표적인 폐단인 세습과 건축 열풍은 모두 신앙이라는 본질이 흐릿해지고, 돈의 공동체가 된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래도 교회에 신자가 몰리고, 부유해지면, 사회에 나누는 것도 많아질 테니 좋은 것 아닐까. 돈이 문제지, 교회를 문제로 볼 필요까지 있을까. 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통로로 족할텐데, 모든 사회 현안에 관여해야 할까. 그가 선 거리에는 어떤 진리가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안고 25일 박 목사를 만났다. 지난 해 8월 65세로 새맘교회 전임목사 직을 내려놓은 그는 지금은 ‘보따리 목사’다. 평신도 공동체 같은 ‘목사 없는 교회’가 원하면 달려간다. 4년 전 출간한 ‘돈에서 해방된 교회’에 이어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을 담은 ‘돈에서 해방된 사회’(가제)를 집필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래도 교회나 현장에서 부르면 가지 않을 수 없다”며 웃었다. 이날도 그는 한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외투와 재킷에 달린 세월호 배지와 오른쪽 팔목에 찬 노란색 세월호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세월호 배지와 팔찌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유족들이 ‘이젠 됐습니다’ 할 때까지 달고 다니려고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핵심은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것’이거든요. 누가 보라고 한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끊임없이 기억하려고 하고 다니는 거죠.”

-‘세월호 참사’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세월호 참사가 지닌 의미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생죽음을 당했어요. 당시 충격과 아픔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에요. 이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을 드러낸 사건이죠. 대한민국이 추구해온 사회적인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엎으라는 역사적 명령이자, 나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한국사회에 주는 명령입니다.”

박득훈 목사는 '세월호 참사'가 주는 역사적 명령을 기억하고자 배지와 팔찌를 차고 다닌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박득훈 목사는 '세월호 참사'가 주는 역사적 명령을 기억하고자 배지와 팔찌를 차고 다닌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명성교회 앞에서도 절규를 하셨죠. 당시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심정이셨나요?

“(한참 고개를 숙이며 침묵한 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 세상에서도 잘 되고 싶은 마음… 그런 욕망의 틈바구니로 부패한 지도자들이 들어온 거죠. ‘나만 믿어라. 그러면 세상에서도 잘 된다. 그러려면 교회가 부흥해야 한다. 내 아들이 이어받지 않으면 무너진다.’ 그 논리에 따라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생짜배기 분노라기 보다는 눈물에서 나온 분노였죠.”

-왜 눈물까지 흘리신 건가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쳤으니까 슬픈 거죠. 예수님이 자신을 완전히 던져서, 그 사랑에 감동을 받아 시작된 공동체가 교회예요. ‘그 교회가 썩어가고 부패하는 걸 보실 때 얼마나 아프고 속상하실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난 거죠.”

박 목사는 성경을 꺼내 요한계시록 3장을 가리켰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제발 좀 문을 열어라’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너무 썩어서 예수님이 그 교회만 생각하면 토할 것 같다고 까지 하셨어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돈의 신 ‘맘몬’을 섬기죠. 그런 ‘미지근한’ 교회에 토해버리고 싶다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결론은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걸로 끝납니다. 그래도 나는 너희들과 함께 먹고 싶다고요. 교회를 포기할 수 없으신 거예요.”

-한국 대형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돈입니다. 건축헌금을 모아 더 높은 성전을 짓고, 그렇게 성장시킨 교회를 아들 목사에게 물려주는 교회들이 비판을 받고 있죠. 종교인 과세도 논란 끝에 시행되긴 하지만, ‘반쪽 짜리’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돈을 추구하는 교회, 왜 문제인가요?

“교회는 돈과 권력으로 지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지키는 곳이에요. 사랑은 쌓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겁니다. 저는 그게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자꾸 세습하려고 하고, 더 큰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종교인 과세를 위한) 소득세 법안을 왜곡 시키려고 하고…. 왜 그러느냐? 따지고 보면 결국 교회가 돈과 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사랑, 정의, 평화,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이걸 실천하는 데 왜 돈이 필요하고 건물이 필요할까요? 결국은 자기 세력, 교세를 확장하려는 거지, 하나님의 가치를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 대목에서 박 목사는 성경에서 예수가 사탄의 시험을 받는 장면을 인용해 더 깊이 설명했다. 사탄은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보라’, ‘나에게 절을 하면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한다. 돈, 신비의 카리스마, 권력으로 예수를 시험한 것이다. 예수는 모두 거절한다. 박 목사는 “예수님은 떡이 아니라 말씀을 중히 여기셨고, 범접할 수 없는 권위주의자가 아닌 대중적인 존재였고, 권세가 아닌 하나님만 섬겼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날 대형교회는 왜 예수의 뜻과 반대로 돈과 권위와 권력을 좇게 됐느냐는 한탄이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됐던 명성교회 세습에 좀더 말을 보탰다.

“돈과 권력이 모인 대형교회가 되고 보니,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게 된 거죠. 세습 자체는 부차적인 문젭니다. 세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회가 된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예요.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맘몬이 됐기 때문인 거죠.”

-그래서 ‘작은 교회’를 주장하시는 건가요.

“교회는 커지면 안됩니다. 성공해서 커진다 해도 쪼개야 해요. 교회가 커지면 위계질서, 계급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 교회의 권력자는 누구와 가까워질까요? 바로 사회의 권력자입니다. 대형교회가 되려는 욕망을 버리고 나눠야 해요. 세속화한 교회가 아닌 저항하는 교회가 돼야 해요.”

-일부에선 교회가 부흥해야 돕는 일도 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예수님은 부자로 살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이 무슨 돈과 권력이 있었나요. 그런데도 역사를 바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 교회가 부자가 돼야 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고, 가진 걸 나눠야지요. 적어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영적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박득훈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거리에 서는 건 당연한 사명”이라고 말했다. 예수가 ‘거리의 예수’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2014년 8월 25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 근처에서 열린 ‘세월호를 기억하는 기독인 모임’의 추모기도회. 교회개혁실천연대 제공
박득훈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거리에 서는 건 당연한 사명”이라고 말했다. 예수가 ‘거리의 예수’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2014년 8월 25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 근처에서 열린 ‘세월호를 기억하는 기독인 모임’의 추모기도회. 교회개혁실천연대 제공

-목회자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하나님한테 딱 걸린 거죠. 하하. 제일 먼저 걸린 게 언제인지 생각해보면, 중학교 시험에 떨어졌을 때예요. 울면서 2차(후기) 학교에 갔는데, 기독교 학교였어요. (한국 개신교계의 원로) 고 한경직 목사님이 만든 대광중학교를 다녔어요. 거기다 중2 때 괜찮게 살던 집안 형편이 아주 어려워졌어요. 그야말로 ‘찢어지는 가난’을 경험했죠.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어요. 자칫 잘못될 수도 있었던 시기인데 오히려 따뜻한 선생님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행복했어요. 그렇게 학교에서 처음 기독교 신앙을 만났죠.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 하나님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주셨구나’ 싶더라고요.”

-목회자인데, 학부 전공이 경제학인 것이 특이해요.

“중학교 때 통학하려면 청계천의 ‘검정다리’를 건너야 했어요. 나무에 검은 콜타르를 묻힌 다리였죠. 그 주변에 판자촌이 있었어요. 불이 나면 순식간에 200, 300채가 타버려요. 사람들은 울고 불고 난리가 나죠. 그걸 보면서 가난의 현장을 온 몸으로 경험했어요. 경제학과를 택한 이유는 빈부의 격차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그런데 대학에 가서 두 번째로 하나님한테 걸리게 되죠. 하하.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 있던 선배와 인연으로 대학 4년 내내 전공책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었어요.”

-더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간증’인데요. 군 제대하는 날 거부할 수 없는 큰 말씀으로 하나님이 제게 오셨어요. 신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부르심’이라고 하죠. 요한복음 21장으로요. 하나님께서 실패한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며 부르신 장면이에요. ‘네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기만 한다면 과거의 잘못, 슬픔, 실패, 좌절 다 뒤로 하고 나와 함께 가자. 그렇지만 너의 끝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게 목회의 마무리다’라는 말씀이죠. 군 생활 내내 제가 베드로가 된 심정이었거든요. 굉장히 그럴듯한 신앙인으로 저를 포장해 동료들을 위로하며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말만 기독교인이었다는 회한이 밀려왔어요. 제대하는 날 아침 졸병 때 설거지하던 냇가 옆에서 기도를 하는데 그 말씀이 다가와서, 그때 헌신을 하기로 결심했죠.”

군 제대 후 한국대학기독인회(ESF)의 캠퍼스 전도자로 첫 사역을 하게 된 게 시작이었다. 박 목사의 말을 빌리면 돈도, 빽도 없는 그를 그 분이 “이끄셨다”는 표현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여정이 이어졌다. 1983년 영국 킹스크로스 한인교회 전도사로 떠나, 이후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국제장로교회(IPC)에서 목사로 임직됐다. 더럼대에서 기독교사회윤리를 전공해 박사 학위도 받았다. 유학 기간 그는 목회자로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저 예수 잘 믿고, 제자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어떤 예수를 믿느냐, 어떤 제자를 만드느냐가 중요한 거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정의를 펼쳐가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도 우리 죄를 용서하고 변화시켜서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하셨던 것이다.’ 경제학과 신학이 합쳐져 박 목사 식의 ‘기독교 경제정의’가 그때 움텄다.

-한국에서 목회 생활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현실은 어땠나요?

“그때 저는 어떻게든 기독교인들을 감동 시켜서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참된 제자로 키워 세상에 보내자는 생각에 꽂혀 있었어요. 그런데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연이 닿아 활동을 하다가 2001년 즈음 광림교회 세습문제가 터졌어요. 그 때 ‘세습에 침묵하면 안 된다’고 나서게 됐고 이후 교회개혁실천연대로 독립해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교회개혁 운동을 하게 됐어요.”

-전임목사로 계셨던 새맘교회도 일반 교회와는 많이 달랐을 것 같은데요.

“2011년 1월부터 2017년 8월 은퇴할 때까지 6년 7개월 동안 정말 행복하게 목회 활동을 했죠. 새맘교회는 우선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진보적인 사람들이 만든 공동체였어요.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였죠. 목사가 좌지우지하는 교회가 아닌, 성도들이 만들어 가는 공동체를 지향했습니다. 교회의 몸집 키우기가 아니라 사회 변화에 집중했어요. 교회도 일요일에 비는 공간을 빌려 썼죠. 근로소득세로 목회자 세금도 자발적으로 냈고요.”

-‘장로선거’도 교회의 부패와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요.

“일부 교회에선 장로가 되면 교회에 내는 (헌금) 액수가 관행처럼 정해져 있죠. 1억 원 정도인 대형교회도 있어요. 새맘교회는 그렇지 않았어요. 장로 본연의 역할을 강조했으니까. 모범이 되는 신앙인으로,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성장하도록 기도든 상담이든 삶의 모범이든 섬겨주는 사람이 장로니까요. 그 자리가 주는 무거움을 알면 장로를 섣불리 할 생각을 못하는 게 당연해요. 저도 은퇴를 했으니 지금은 장로예요. 제게 목사 임직을 한 IPC는 장로로 안수를 해주거든요. 목사 역할이 끝났으니 지금 저는 ‘프리랜서 장로’예요.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장로라고 불러달라고 해도 잘 안되더라고요. (웃음)”

박득훈 목사. 고영권 기자
박득훈 목사. 고영권 기자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는데, 교회가 거리로 나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이 일단 거리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늘 현장에 계셨어요. 교회라는 건물 안에 갇혀계신 분이 아니라 거리에서 가난한 이웃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니 거리로 나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에요.”

-한국 교회가 부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 교회가 ‘안톤의 실명’ 증세를 앓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신경학자) 안톤이란 사람이 발견해낸 질병이죠. 분명히 시력을 잃었는데 환각 증세로 보인다고 확신하는 증상이에요. 한국 교회도 돈에, 권력에 눈멀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교회가 부활하려면 ‘그 동안 우리가 눈멀었구나’라고 깨달아야 해요. 그래야 눈을 뜨죠. 세상이 명성교회의 세습이 문제라고 비판하지만, 명성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복음을,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안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간 맘몬을 섬겨왔다는 걸 회개해야 해요. 이 세상이 교회만 생각하면 학을 떼고 있다는 걸, 세상이 교회를 환자 취급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인으로서 생각하는 삶의 도, 삶의 길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설교) 속 8복에서 묘사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라고 생각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피 우는 사람, 온유한 사람, 하나님의 정의에 목마른 사람, 긍휼히 여기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만드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핍박 받는 사람’이죠. 세속적 권한이나, 부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떠오르는 예배 시간이 있다. “저러면…, 돈 없는 사람은 어떻게 교회에 오겠니.” 곁에서 어머니가 나직이 말했다. 목사는 헌금 봉투에 적힌 신자들의 이름을 정성껏 불러주며, 축복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돈에 손을 짚고 축복하지 않는 교회를 찾기. 힘든 노정의 시작이었다. “더 크고 높은 성전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동네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등지고 나온 일이 여러 번이다. 아직도 온존하는 교회의 현실이다. 사회의 진보나 개혁보다, 교회의 그것이 더 어렵다고 느끼는 건 일부의 생각이 아닐 테다.

박 목사가 인용한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꾸짖는다. 그래도 마지막엔 이렇게 호소한다. “회개하여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 밖에, 예수가 서 있다. 목숨을 내어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한 헤아릴 수 없는 그 사랑의 마음으로, 회개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그 사랑을 기리는 부활절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