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북스토리] 인간과 사진 찍는 호랑이, 코로 그림 그리는 코끼리

입력
2018.03.28 18:34

오랜만에 찾은 태국은 예전과 달랐다. 태국이 달라졌다기보다 내가 달라졌다. 꽤 오래 전 나는 별 생각 없이 코끼리 쇼를 보고 나오다가 쇼에 나온 코끼리의 수명이 무척 짧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는 동물 쇼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죄책감만 잔뜩 안고 돌아왔다.

이번엔 코끼리 보호소에 봉사 활동을 하러 간 거였으니 방문 목적 자체가 달랐다. 시내에는 현지 투어를 중계해주는 사무소가 많은데 코끼리 체험이 많고, 호랑이, 코브라 등 동물 관련 투어 팸플릿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코끼리에 직접 타지 않는 관광상품임을 알리는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관광 팸플릿들. 관광객들이 코끼리를 타는 것이 학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외면하자 발 빠른 사업 전환을 한 모양새다.
코끼리에 직접 타지 않는 관광상품임을 알리는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관광 팸플릿들. 관광객들이 코끼리를 타는 것이 학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외면하자 발 빠른 사업 전환을 한 모양새다.

그런데 많은 코끼리 투어가 관광객이 직접 코끼리 등에 타지 않는 ‘NO RIDING’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코끼리를 타는 것이 학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외면하자 발 빠른 사업 전환을 한 모양새였다(실제로 코끼리를 타지만 않을 뿐 사업적으로 코끼리 체험 투어를 운영하는 곳이 많아서 동물보호활동과 연계되는 곳을 찾으려면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지인들이 TV프로그램 <런닝맨>의 출연자들이 태국 호랑이와 사진을 찍고, 코끼리 그림 그리는 내용이 나왔다고 원성이었다. 태국의 호랑이 공원은 호랑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폭력을 가한다는 동물단체와 미디어의 폭로로, 태국 정부의 수사가 이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내가 간 치앙마이에도 호랑이 공원이 있었고, 툭툭 기사가 추천할 정도로 관광 명소지만 나는 차가 꽉 찬 주차장을 씁쓸하게 보며 지나쳤다. 그곳은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호랑이와 사진 찍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팸플릿에는 이곳 호랑이는 수면제를 먹이지 않고, 야행성이라서 낮에 자는 것뿐이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순한 거라고 구구절절 변명을 하고 있었다.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를 폭력을 쓰거나 약을 먹이지 않고 다정하게 투샷을 찍을 수 있다고? 그들은 마음의 소리로 대화를 하나? 호랑이 공원은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 이런 변명이라도 하는데 한국 TV프로그램은 변명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동물 끌어들이지 말고 프로그램 이름대로 그냥 달리기나 하지!

코끼리는 코로 붓을 쥐지 않는다. 코끼리 코는 인간의 눈과 코, 손, 기계가 하는 일을 합친 것과 같아서 코로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새끼를 구하고, 새끼를 안심시키고, 진흙을 튀기고, 식량을 모으는 많은 역할을 한다. 그런 코끼리 코에 붓을 쥐게 하려면 사람을 등에 태울 때와 마찬가지로 파잔(phajaan)이라 불리는 잔인한 복종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파잔은 어린 코끼리를 좁은 곳에 가둔 채 복종할 때까지 밤낮없이 찌르고 굶기고 잠을 못 자게 하는 폭력을 통해 야생성을 잃게 하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코끼리가 육체와 감정은 물론 영혼까지 상처를 입게 되면 비로소 등에 인간을 태우고 코로 붓을 쥐게 된다.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여행에서 만나 함께 하루를 보낸 모짜, 깡능, 문틍. 이들은 산속에서 벌목된 나무를 옮기는 노동을 하다가 벌목이 금지되자 도시에서 쇼를 하거나 관광객에게 구걸을 하면서 지내다가 구조되돼 깊은 산 속 보호구역에 마련된 평생의 안식처에 안착했다.
태국 치앙마이 코끼리 여행에서 만나 함께 하루를 보낸 모짜, 깡능, 문틍. 이들은 산속에서 벌목된 나무를 옮기는 노동을 하다가 벌목이 금지되자 도시에서 쇼를 하거나 관광객에게 구걸을 하면서 지내다가 구조되돼 깊은 산 속 보호구역에 마련된 평생의 안식처에 안착했다.

이번 여행길에서 나는 모짜, 깡능, 문틍이라는 세 코끼리와 하루를 보냈다. 셋 다 산속에서 벌목된 나무를 옮기는 노동을 하다가 벌목이 금지되자 도시에서 쇼를 하거나 관광객에게 구걸을 하면서 지내다가 구조되어서 깊은 산 속 보호구역에 마련된 평생의 안식처에 안착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문틍이 마흔 살이었고, 셋 다 여자였다. 그녀들과 하루를 보내면서 코끼리 코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하는지 눈앞에서 확인했다. 나무를 쓰러뜨리고, 가지를 훑어서 잎을 먹고, 진흙을 뿌리고, 옆의 코끼리 몸을 만지며 대화를 나누고, ‘뿌우~’ 소리를 냈다. 내가 바나나를 주다가 버벅대자 코로 공기를 훅 불었다. “야, 너 코 냄새 장난 아니다.” 장난도 쳤다.

코끼리는 거의 모든 일을 코로 한다.
코끼리는 거의 모든 일을 코로 한다.

그녀들 사이에 있는데도 나는 벌써 그녀들이 그리웠다. 내내 그리워하다가 또 만나러 가야지. 몇 십 년 후에는 지구 코끼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멸종을 맞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들은 살아남을 것 같으니까.

생태학자인 칼 사피나는 동물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 지에 대해서 서술한 <소리와 몸짓>에 이렇게 썼다. ‘세계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동물에게도 존재할 정당성이 있다. 우리보다 더 큰 정당성을 지닐지도 모른다. 그들이 먼저 왔으니까. 그들이 우리 존재의 기초에 있으니까. 그들은 필요한 것만 가져가니까. 그들은 주위 삶과 공존이 가능하니까. 그들이 지킬 때 세상은 지속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았다. 그들은 인간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모습 그대로 존재해야 한다.

글ㆍ사진 김보경 책공장 더불어 대표

참고한 책: 칼 사피나 <소리와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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