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포세대’의 확산... “가상화폐, 흙수저 탈출 마지막 기회”

입력
2018.01.15 04:4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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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

2030 투자 비중이 60% 육박

“부동산ㆍ주식처럼 정보 없어도

가상화폐는 공정하게 투자 가능”

“왜 유일한 계층상승 통로 막나”

정부 잇따른 규제에 격렬 반발

대기업 4년 차 직장인 박모(33)씨는 지난해 여름, 주식에 투자했던 3,000만원을 고스란히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월급만으론 여유 있는 삶을 사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 주식 투자를 계속 해오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비트코인으로 갈아탄 것. 다른 투자자에 비해 늦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2.5배 수익을 냈다. 박씨는 “대기업 연봉이라 해도 4,000만~5,000만원인데 알뜰살뜰 모아야 겨우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라며 “계층 상승 통로가 막혀 상류층으로의 이동을 꿈꿀 수 없던 우리 흙수저 세대에게 비트코인 투자는 유일하게 ‘수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대학교 4학년인 김모(26)씨도 얼마 전 아르바이트로 꼬박 모은 500만원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취업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실이 녹록하지 않아 돈이라도 모아서 든든한 뒷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김씨는 “요즘 세상에 집안도 별로이고 빽(Backㆍ연줄)도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 된다고 여겨 비트코인을 시작했는데, 거래소를 폐지하겠다는 (정부) 발상은 정말 황당하다”며 “이걸 도박이니, 투기니 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로 몰고 가서 없애려는 건 공산주의나 다름 없는 거 같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가상화폐 거래소 폐쇄까지 검토한다”는 11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 발언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기를 든 것은 2030 청년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가상화폐 투자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 국내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 빗썸이 지난해 11월 이용자 4,1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20대와 30대 이용자가 각각 29%를 차지, 전체 투자자 중 2030이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육박했다.

청년들의 ‘비트코인러시’는 계층 상승 사다리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른바 흙수저를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이라는 것이다. 학자금 대출 상환에 시달리는데, 청년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으로 치솟고, 취직을 한다 해도 내 집 마련은 하늘에 별 따기인 게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이다. 연애ㆍ결혼ㆍ출산 3가지를 포기해야 했던 청년을 일컫는 삼포세대는 이제 무한정한 N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N포세대’로 확장되고 있다. 이렇게 사회경제적으로 점점 팍팍해져 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순식간에 일확천금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되는 가상화폐 투자가 유일한 대안이 돼버린 것이다. 8만원을 투자해 280억원을 번 23세 청년과 비슷한 사례가 매스컴에 소개될 때마다 열광하며 희망을 갖는 식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2030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취업은 힘들고 부의 대물림은 심각해진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봐온 세대”라며 “그런 청년들이 가상화폐 투자로 고수익을 올리는 사례를 자주 목격하다 보면 그것이 유일한 계층 사다리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풀이했다.

가상화폐 투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평등한 기회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트코인 투자 3년째인 직장인 우모(29)씨는 “가상화폐는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처럼 땅이나 기업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거액의 자본금이 없어도 문제 없다”라며 “흙수저도 진입장벽 없이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투자”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가상화폐 투자에 대한 무분별한 규제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개발시대의 과실(果實)을 만끽했던 기성세대가 이제 와서 청년세대의 투자 기회마저 박탈하려는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다. 정부의 규제 방침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가상화폐가 거품이라는 고위 공직자들은 다주택 소유자에 고액 자산가’라는 반응도 같은 맥락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역사상 계층 사다리가 이렇게 닫힌 적이 없는데 거래소를 폐쇄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니까 청년들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라며 “청년들 입장에선 기성세대는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돈을 다 벌어 놓고 청년들이 비트코인 투자로 돈을 좀 벌어보려는 데 밥상을 걷어차는 꼴”이라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청년들에게 비트코인은 스스로 삶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계기로 개천에서 용이 돼 보겠다는 몸부림이었는데 갑자기 규제를 한다고 하니 엄청난 반발이 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구 교수는 “가상화폐 투자에 청년들이 몰려드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노동 의욕을 상실하고 한 번에 계층 상승을 노리는 풍토가 늘어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14일 오전 비트코인 등 가사오하폐 시세가 표기되는 서울 중구 한 가상화폐 거래소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14일 오전 비트코인 등 가사오하폐 시세가 표기되는 서울 중구 한 가상화폐 거래소 전광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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