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중의 고전산책] 관포지교의 반전

입력
2017.08.21 10:40

관포지교(管鮑之交)는 관중과 포숙의 우정이 돋보이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기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잇속만 챙긴 속물근성도 있는 관중의 미래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주군께서 패왕이 되려고 하신다면 장차 관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사기> ‘제태공세가’)라고 하면서, 제안 받은 재상 자리를 양보한 포숙의 안목과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란 관중의 극찬에서 보여지듯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고사다.

포숙의 안목처럼 관중은 “창고가 차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는 실용노선을 취하면서 패왕의 술에 밝았으며,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제나라 환공(桓公)이 아홉 차례나 제후들과 회맹하여 한 번에 천하를 바로잡음으로써 다섯 패자(覇者) 중에서도 우두머리가 될 때까지 그는 수십 년 동안 중보(仲父)의 위상을 갖고 있었던 국정 2인자였다. 세속의 말에 끌려 다니지 않을 만큼 소신이 강했던 관중이 늙고 병들어 국정을 관장하지 못하게 될 때, 환공의 문병을 직접 받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환공은 그 자리에서 후임 재상 추천을 부탁했다. 관중은 “신하를 잘 아는 데는 그 왕만 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고사했다. 그러자 환공은 관중이 포숙을 추천할 것으로 여기고는 그가 적임자가 아니겠느냐고 먼저 운을 뗐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안 됩니다. 포숙은 사람됨이 지나치게 곧고 고집이 세며 일 처리에 너무 과격한 면이 있습니다. 강직하면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나설 우려가 있고, 고집이 세면 백성들의 마음을 잃게 되며, 과격하면 아랫사람들이 등용되기를 꺼릴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패왕의 보좌역이 아닙니다”(<한비자> ‘십과十過’).

두 사람의 우정이 과연 진실이었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긴긴 세월 동안 관중은 서릿발 같은 냉정함으로 친구인 포숙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라는 데에 무게 중심이 실린다. 그러자 환공은 자신이 염두에 둔 측근 세 명을 순서대로 적임자인지 물었다. 먼저 수조(竪刁)에 대해 물었다. 관중은 수조가 여색을 밝히는 환공의 마음에 들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여 내시가 되어 후궁을 관리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자가 어찌 그의 왕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자 다시 개방(開方)이란 자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관중은 “군왕을 섬긴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 있는 부모를’ 15년 동안이나 찾지 않았으니, 사람의 정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부모도 섬기지 않는데 어찌 왕을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고 인성의 문제를 거론하며 반대했다. 환공이 재차 역아(易牙)란 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관중은 역아가 자기 맏아들의 머리를 삶아 환공에게 요리로 바친 일을 거론하면서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데 어찌 군왕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반대했다.

환공은 자신의 측근 3명을 반대하는 분명한 논리를 들으면서, 관중이 절친인 포숙마저 적임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 관중은 의외의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바로 습붕(隰朋)이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그는 사람됨이 안으로는 굳은 마음을 지녔고, 밖으로는 청렴하며 욕심이 적고 신의가 두텁습니다. 안으로 마음이 굳건하므로 표준으로 삼을 만하며, 밖으로는 청렴하므로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또 욕심이 적으므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고, 신의가 두터우니 이웃 나라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패왕을 보좌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일 것입니다”(<한비자> ’십과’).

습붕이 누구던가. 환공이 관중을 중보로 삼으려 할 때, 동곽아(東郭牙)라는 신하가 권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면 제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대하자 그 대항마로 나라 안의 일을 다스리며 관중은 주로 나라 밖에서 활동하도록 한 인물이었다. 물론 고죽국(孤竹國)을 함께 정벌하면서 협치의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환공 측 사람인 습붕이야말로 관중의 입장에서 보면 선뜻 내키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관중이 그런 자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과연 환공이 누굴 선택했을까. 환공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밀약이나 거래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관중이 죽자, 습붕을 등용하지 않고 수조를 등용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관중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수조는 3년 만에 환공이 남쪽 지역인 당부(堂阜)에서 순유하는 틈을 노려 역아, 개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은 남문의 침궁(寢宮)에 갇혀 굶주리다 죽음을 맞이 했고, 그의 시신에 생긴 벌레가 문밖으로 기어 나오는데도 석 달 동안이나 아무도 몰랐다.

환공이 만일 습붕을 재상으로 등용했더라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여 천하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환공은 그 당시 수(數) 싸움에서 관중보다 한 수 위라고 속으로 자평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관중의 충심과 안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을 범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김원중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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