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칼럼] 특목고 폐지론

입력
2017.06.11 13:48

‘평준화’ 도입 때보다 심각한 교육상황

공교육 실종과 사교육 번창 등 부작용

공정성 잃은 시스템은 우선 개혁 대상

40여 년 전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한창 공부에 열을 올리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보수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떻게 그렇게 좌파적인 ‘평준화 조치’를 취했는지 오랫동안 의문이었다. 요즘에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모로 그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첫째, 당시는 모든 학교가 선발권을 가졌지만, 지금은 특목고 등 일부만 선발권을 가진다. 모든 학교가 선발권을 가져도 일부 명문학교가 인재를 싹쓸이하고 과외열풍을 불렀다고 아예 입시를 없앴다. 반면 외고는 외국어에 소질과 적성이 있는 학생을 뽑으라고 준 선발권을 남용해 전과목 우수자를 싹쓸이하고 있으니, 분명한 탈법 특혜다. 둘째, 당시는 입시준비를 초6, 중3, 고3 때 집중적으로 했다. 평소에는 비교적 잘 놀았지만 지금은 초등학교 때부터 쉴 새 없이 입시 준비를 한다.

셋째, 당시는 어쨌든 공교육이 우선이었지만 지금은 분명히 사교육이 우선이다. 더욱이 공교육을 살린다고 계속 내신반영 비율을 확대하는데도 사교육이 더욱 팽창하고 있다. 과거에는 입시에 내신을 반영하지 않아도 공교육이 멀쩡했다. 학교 공부를 잘 하면 입시도 잘 볼 수 있었다. 지금은 학교 공부를 잘 해봐야 입시에 도움이 안 된다. 내신을 통해 공교육을 살리겠다는 헛된 꿈은 깰 때가 됐다.

넷째, 그래도 당시에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특목고 등은 초등학교 때부터 엄청난 사교육비를 댈 능력이 없으면 꿈도 못 꾼다. 사교육이 저출산 양극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 다섯째, 과거의 사교육 시장은 몇몇 유명학원 외에는 대부분 대학생 아르바이트가 차지했다. 시가총액 1조 원대에 달하는 사교육업체가 등장할 정도니, 국가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란 점에서도 문제가 심각하다..

여섯째, 당시는 교육과 부동산 가격은 별개였지만 지금은 밀접히 연관돼 있고, 그에 따른 지역ㆍ계층 위화감이 극심하다. 일곱째, 당시 대학생들은 자기주도학습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학생들에 대한 대학교수들의 만족도가 형편없다.

여덟째, 당시에는 외국유학이 자유롭지 않아서 조기유학은 극히 드물었지만, 지금은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조기유학이 급증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외국에 유학을 보내자는 것이지만, 그에 따른 가정 해체ㆍ붕괴 등의 부작용이 크다.

마지막으로, 수월성 교육이다. 수월성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현행 제도에서도 수월성 교육의 길은 얼마든지 있다. 현행 영재교육진흥법에 의하면 영재고뿐만 아니라, 학교별로 영재학급과 함께 교육청별로도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특목고 등이 우수 인재를 싹쓸이해가는 현 체제하에서는 영재교육 자체가 설 땅이 없다.

아직도 학벌주의와 연고주의가 뿌리 깊고, 그래서 여전히 교육수요가 폭발적인 우리나라에서 단지 ‘뽑는 방식’만으로 수월성 교육을 추구하는 것은 경쟁시장에서 독과점체제를 인정하는 것처럼 하책이자 부당하다. 교육은 잘 가르치는 것이지, 잘 뽑는 게 아니다.

어느 시스템이 현저하게 공정성을 상실하면 마땅히 개혁 대상이 된다. 특목고 등이 공정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어느 초등학생 아빠의 얘기를 들어보자.

“아이가 엄마에게 ‘나 외고 갈 거야’라고 하자, 엄마는 혀를 차면서 ‘얘, 거기가 아무나 가는 덴 줄 아니? 아빠 월급 가지고 거기 갈 수 있는 학원비는 못 대줘.’ 아이는 상심하는 눈치고 못난 아비는 주눅이 듭니다. 그리고 억울해지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집안 사정상 외고에 갈 수 없는 계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옛날 명문 고등학교에 가려면 공부만 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사회적 벽이 있습니다.”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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