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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비용의 정치학]

겉으로는 더치페이 외치면서
속으로는 팽팽한 줄다리기
연인 71% “돈 문제로 헤어질 수 있다”
와인과 파스타 그리고 사랑이 곁들여진 테이블. 그런데 오늘의 데이트 비용은 누가 낼까? 18일 서울 서초동 레스토랑 태번38에서 연인들이 계산서를 사이에 둔 채 와인잔을 부딪치고 있다. 홍인기 기자

5년 전 이맘때를 그는 잊지 못한다. 벚꽃이 만개한 그 날 최모(32)씨는 사귄 지 다섯 달 된 여자친구에게 몸살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데이트 할 돈이 없어서였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던 그는 당시 중학생 두 명에게 과외를 하며 한 달 7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일주일에 데이트 두 번, 길게 잡아 보름만 지나도 주머니에는 남는 돈이 없었다. 여자친구는 직장생활을 하며 억대 연봉을 받고 있었지만, 야속하게도 계산대 앞에서는 늘 딴청만 피웠다.

‘그래도 일년에 한 번인데 벚꽃은 보러 가야지….’ 최씨는 책상 서랍, 안 쓰고 처박아 두었던 지갑, 겨울에 입었던 코트, 3년 전 입던 바지 주머니까지 방안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렇게 모인 돈이 2만7,000원. 아무리 궁리해도 저녁 한 끼 먹을 돈이 안 됐다. 최씨는 결국 약속 3시간 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만남을 취소했다. 사랑했지만 만날 수 없었고, 사랑했으므로 말할 수 없었다.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

데이트 비용은 최근 몇 년 새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젠더 전쟁의 최전선 중 하나다. 어떤 소재든 성차별을 지적하는 기사 밑에는 어김없이 ‘데이트 비용이나 반반 내라’는 남성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리고, 여성들은 ‘취업, 임금, 가사, 육아 모든 것에서 차별 받는데 왜 데이트 비용만 동등해야 하냐’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꽃잎 난분분 흩날리는 봄이 왔건만, 연인들의 나눗셈은 갈피를 못 잡고 흩날린다. 얼굴은 웃으며, 머리 속으로는 오늘 낼 데이트 비용을 계산하느라 바쁜 연인들. 누군가는 용감하게 ‘내가 쏠게’를 외치며 식탁 위의 영수증을 낚아채지만 계산서를 든 손은 늘 떨리기 마련이다. 겉으로는 더치페이를 외치면서도 속으로는 누가 더 낼지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는 연애비용의 정치학이다.

이 줄다리기에 신물 나 잡은 손을 놓아버리면 연애는 종종 결별로 종결된다. 온라인 여론조사기관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지난해 10월 10~50대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데이트 비용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데이트 비용 문제로 헤어질 수 있다’고 답한 연인이 전체의 71.1%나 됐다. 여성이 78.6%로 남성 63.6%에 비해 데이트 비용 갈등에 더 단호했다.

둘이 간 커피숍에서 음료는 늘 한 잔만 주문하던 남자친구와 오래 사귀었던 직장인 김모(32)씨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의 문제라 여기서 자꾸 충돌이 일어난다면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매번 음료 한 잔에 빨대 두 개 꽂아오는 애인이 처음에는 너무 싫었어요. 내게 쓰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원래 알뜰한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죠.” 연애하는 동안 남자친구와 비슷한 정도로 비용을 부담했다는 유모(37)씨는 “남자건 여자건 연인을 위해 돈을 쓴다는 건 자발적 애정의 표현 아니냐”며 “데이트 비용을 놓고 갈등한다는 건 사랑이 부족하거나 애정이 일방적이란 얘기므로 결별하는 게 낫다”고 단언했다.

남자들의 자발적 올가미

‘데이트 통장 만들어 반반씩 비용 부담하자니까 여자친구가 펑펑 울더라’, ‘돈을 안 쓰는 건 사랑하지 않는 거니 헤어지자고 하더라’…. 남자들의 이런 심경 토로는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에 하루가 멀게 올라오는 사연들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돈 얘기처럼 구차하고 꺼내기 어려운 주제도 사실 없다. ‘데이트 비용 문제는 기분 상하지 않게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문제’라는 항목에 74.4%나 찬성해 놓고, 막상 데이트 비용에 대해 연인과 얘기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절반도 안 되는 34.9%만 그렇다고 답하는 게 현실이다.

문제는 자존심. 남자들의 ‘백마 탄 왕자 증후군’이 데이트 지출에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박모(31)씨는 여자친구에게 데이트 비용에 대해 넌지시 언급했다가 최근 대화를 아예 포기했다. “여자친구한테 부담 주는 것 같고, 괜히 관계가 어색해지더라고요. 여자친구가 은근히 다른 커플과 비교하는데 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어요.” 속은 탈지언정 계산서를 들고 의기양양 카드를 긁는 편이 남자로서의 위신을 세우는 데 훨씬 더 유효하다는 판단인 것이다.

마크로밀 엠브레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데이트 할 때 남자가 여자보다 돈을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높았다. 여성은 ‘경제적으로 더 여유 있는 사람이 모두/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이 37.2%로 가장 높았지만, 남성은 ‘남자가 여자보다 좀 더 많이 내야 한다’는 응답이 35.2%로 가장 높았다. 정작 여성은 ‘남자가 더 많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23.4%로 ‘남녀 모두 똑같이 내야 한다’(34.8%)보다 훨씬 적었다. 남자 스스로 ‘남자가 더 많이 내야 한다’는 생각에 더 강력하게 종속돼 데이트 비용 부담을 자처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남자인 내가 경제권을 갖는 이상 다른 모든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맨박스(남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남성 스스로 갇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 남자는
‘백마 탄 왕자’ 자처하며 카드 긁지만
속내는 “여친이 내줬으면…”
# 여자는
“자기들은 친구들과 펑펑 쓰면서…”
‘개념녀 여친’ 원하는 남자들 이해 안돼
“스스로 더 내는 ‘개념녀’가 되어줘”

물론 남자들은 여자친구가 데이트 비용 분담에 나서주길 바란다. 단 자발적으로, 스스로, 먼저, 알아서, 기분 상하지 않게. 이른바 ‘개념녀’를 원하는 것이다. “서울대공원 데이트 할 때 지갑을 안 가지고 간 적이 있어요. 평소에 내가 돈을 많이 내서 내심 돈 내주길 기대했는데, 웬걸, 제가 집에 가서 지갑을 가져오는 동안 기다리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날의 서운함을 잊지 못하는 김모(29)씨는 “남자가 돈 내는 버릇을 들이는 건 여자”라고 주장했다.

이런 남자들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심정은 복잡하다. 친구들과 만나 진탕 술 마시고 게임 하는 데 쓰는 돈은 아끼지 않으면서 여자친구 앞에서만 개념녀를 들먹이며 ‘반반 부담’을 주장하는 남자를 온전히 포용하기란 쉽지 않다. ‘개념녀’가 불평등한 젠더 구조 안에서 여성을 다시 한 번 착취하려는 이중의 프레임이라는 의혹마저 여성들 사이에선 횡행한다.

“남자친구가 돈을 일절 못 내게 해 내심 불편하지만 자존심이겠거니 배려했어요. 돈을 모았다가 옷이나 향수 같은 걸 가끔 사주면서 나름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요.” 이모(25)씨는 “남자로서의 권력도 행사하고 싶고, 돈은 아끼고 싶고, 스스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 아니냐”며 “남자친구가 진지하게 비용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을 때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못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다.

데이트 비용을 전담하는 쪽이 남성으로 고정된 것만도 아니다. 대학생 채모(21)씨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남자친구와 2년간 연애하면서 데이트에 드는 거의 모든 비용을 혼자 부담했다. “남자든 여자든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이 내는 거고, 데이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자친구가 제가 돈 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많이 섭섭했죠. 돈 문제라기보다는 마음 문제예요. 무슨 스폰서도 아니고 돈 내는 게 당연하게 정해져 있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연인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호갱님’이 되는 슬픈 현실. 서로가 서로에게 ‘호갱님’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날의 연인들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성 평등을 향한 과도기적 갈등

데이트 비용 문제는 거대한 가부장적 문화의 자장 안에서 살펴봐야 한다. 전통적 가치가 급속히 붕괴하고 남녀평등이 확산일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부장제 사회ㆍ문화는 공고하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아직 남성과 동등하지 않은 것이 데이트 비용 부담이 불균등한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명절 노동이나 육아처럼 가부장제적 전통이 채 바뀌지 않아 여자가 부담해야 하는 미래의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가 현재 데이트 비용에 반영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남성 입장에서는 사회가 변한 만큼 데이트 비용에서도 균등 부담을 주장하고 싶다. 여성은 임금격차ㆍ가사와 육아 부담이라는 막중한 억압 체제는 도외시한 채 데이트 비용에서만 엄격한 성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데이트 비용 갈등은 가부장적 문화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지 단독으로 타파할 수 있는 모순이 아닌 것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는 남자가 모든 경제활동을 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졌던 전통적 구조에서 서서히 양성평등 체제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라며 “지금은 남자가 70% 낼지라도 곧 60%, 50%로 균형을 잡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양성 간 평등과 불평등이 뒤섞인 현재의 과도기가 지나면 데이트 비용에 대한 갈등도 한층 잦아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저마다 나름의 사정과 고민이 있는, 이 죽일 놈의 연애 비용. 비용 정산을 따지기 전에 연인들은 다시 근원적 질문으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함께 있길 원한다.’ 서로를 향한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비용 갈등을 타파할 순 없을까.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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