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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음식'에서 '고급 식재료'로 업그레이드

스페인 이베리코ㆍ지리산 흑돼지
품종 다양해지며 고급화
소고기처럼 숙성 바람도 불어
드라이ㆍ아이스에이징 등 다양
굽는 기술인 그릴링도 진화
겉은 지지고 속은 촉촉하게
서울 논현동 ‘남고집 블랙라벨’의 기본 상차림. 육색이 붉어 소고기처럼 보이지만, 이베리코 최상 등급인 베요타 돼지고기다.

화력 좋은 숯을 넣은 화로가 열기를 뿜어낸다. 충분히 달구어진 철망 위로 검붉은 고깃덩이가 놓이자, 물기가 재빨리 도망치는 “칙” 소리부터 난다. 숙련된 직원이 고깃덩이의 여섯 면을 강한 불에 다갈색으로 지진다. 불의 온기가 고기 속까지 충분히 미친다. 잘 드는 가위로 뚝뚝 베어낸 고기를 또 한 번 앞뒤로 지진다. 구수한 향취가 물씬 풍긴다. 입 안에 넣으면 묵직한 육향과 함께 육즙이 팡팡 터진다. 잘 절인 명이 나물과 생 와사비, 히말라야의 벚꽃 빛깔 소금에 즉석에서 갈은 통후추까지 곁들여진다.

이 고급스러운 고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예상대로 소고기일까? 실은 돼지고기다.

돼지고기 삼겹살은 오랫동안 ‘서민 음식’으로 굳건한 인기를 지켜왔다. 삼겹살을 먹기 시작한 건 호흡기에 꽉 찬 분진을 돼지기름으로 씻어내려던 탄광촌 광부들이었다. 그런 삼겹살이 어느새 값비싼 ‘금겹살’로 불리고 있다. 온 국민이 삼겹살을 편애하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삼겹살 몸값이 휙휙 뛴 것이다.

소고기처럼 마블링이 선명한 베요타 등급의 이베리코 돼지고기. 네모지게 자른 왼쪽 두 덩이는 갈빗살, 오른쪽 두 덩이 중 위는 목심, 아래는 목등심이다.
돼지고기 시장에 부는 ‘품종 다변화’ 바람

‘금겹살’로 업그레이드된 돼지고기 시장에 또 한 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급화 바람이다. 위에서 소개한 식당은 서울 논현동의 ‘남고집 블랙라벨’. 원래는 1++ 등급 한우 전문점이었는데, 지난해 4월 프리미엄 메뉴로 이베리코(Iberico) 돼지고기를 선보였다. “한우 1++ 등급의 맛에 견줄 만큼 특별한 돼지고기를 손님들이 경험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소고기 못지 않은 돼지고기’로 불리는 이베리코 돼지고기, 그 중에서도 최상 등급인 ‘베요타(Bellota)’ 등급은 고소한 맛이 뛰어납니다. 소고기처럼 붉은 육색에 향도 굉장히 진하죠.” 사장 송희정씨는 스페인에서 이베리코 베요타 등급 돼지고기를 수입해 쓰고 있다. 가격대는 1인분당 2만원 정도로 만만하지 않지만 한 번 맛본 손님은 대부분 다시 찾는다.

최근 들어 돼지고기 구이집들이 이베리코를 적극적으로 들여 놓는 추세다.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이베리코 돼지고기는 베요타 아래 등급으로, 세보 디 캄포(Cebo de Campo)와 세보(Cebo)가 있다. 베요타 등급은 방목 환경에서 자유롭게 도토리, 과일, 버섯 등을 먹고 자라고, 세보 디 캄포 등급은 방목을 하되 사료를 먹인다. 세보 등급은 우리에 가두고 사료를 먹인다. 베요타 중에서도 ‘100% 베요타’는 순종 혈통을 가진 이베리코 돼지로 가장 비싸다.

이 같은 품종 다변화가 돼지고기 고급화를 이끌고 있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문정훈 교수는 이런 현상을 반긴다. “몇 해 전에 시작된 제주 흑돼지 붐으로 돼지고기도 품종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소비자들이 인식하게 됐습니다. 제주 흑돼지처럼 버크셔K 품종인 지리산 인근 흑돼지도 주목 받고 있습니다. 버크셔K는 외래산 품종인 버크셔 돼지가 대를 잇는 동안 토착화한 것인데, 아예 품종명을 브랜드로 만들어 판매하는 곳도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시장을 장악한 백색교잡종(YLDㆍ요크셔(Y), 랜드레이스(L) 품종을 교배해 나온 돼지와 듀록(D) 품종 돼지를 교배시킨 삼원교잡종)이외에도 다양한 특화 품종과 단일 품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YBD(요크셔와 버크셔를 교배한 돼지와 듀록을 교배시켜 낳은 것)와 듀록 등이죠.”

품종 다변화 바람엔 수입산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도 한몫하고 있다. 이베리코 돼지뿐 아니라 칠레의 ‘아그로 수퍼(Agro Super)’, 일명 ‘안데스 삼겹살’도 최근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샤브샤브용이나 대패삼겹살용 등 주로 저가 위주였던 수입산 돼지고기 시장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문 교수는 품종 다변화로 삼겹살에 치중된 소비자들의 돼지고기 선호 부위가 달라질 것이라 예상했다. “이베리코의 삼겹살 부위는 대부분이 지방이라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목심, 항정살, 갈빗살, 치맛살 등 다른 부위들을 맛볼 기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돼지고기는 삼겹살만 맛있다는 오해가 깨질 때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농촌진흥청과 함께 국내 800가구의 6년치 돼지고기 구입 영수증을 추적 분석한 결과, 앞다리 소비는 늘어난 반면 삼겹살은 줄었습니다. 비싼 삼겹살 대신 싸고 맛은 떨어지지 않는 앞다리가 대접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울 상암동 '서동한우'에서 드라이에이징(건조숙성)하고 있는 돼지고기. 서동한우 제공.
두 번째 화두, 숙성

서울 상암동의 ‘시간돼지’는 소고기 시장을 휩쓴 ‘드라이에이징(건조 숙성)’을 돼지고기에도 도입했다. 이 식당은 삼겹살과 저지방 특수부위를 포함한 모둠 메뉴를 기본으로 내놓는다. 저지방 특수부위는 앞다리와 뒷다리다. 퍽퍽한 뒷다리살은 숙성 과정을 거쳐 구이용으로 적합하게 재탄생한다.

시간돼지에 드라이에이징 돼지고기를 공급하는 ‘서동한우’ 정천수 본부장의 설명. “돼지고기를 오랜 시간 드라이에이징 하면 맛이 농축되고 육질이 부드러워집니다. 드라이에이징 소고기에서 치즈 향이 나는 정도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진 않지만, 숙성한 고기 특유의 장점이 드러납니다. 숙성 기간에 발생하는 보관과 관리 비용이 상당한 데다 숙성 과정에서 말라붙는 고기의 겉 부분은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단가가 상승하는 것이 단점이죠.” 올해 설엔 선물용 드라이에이징 돼지고기 주문량이 예상치를 훌쩍 넘겨 공급이 달렸다고 한다.

돼지고기 건조 숙성 기간은 30일에서 45일 이상까지 되기도 하는데, 맛의 편차를 줄이는 것이 관건인 듯하다. 필자가 설 직후 시간돼지에서 맛본 30일 숙성 돼지고기에서는 장기간 드라이에이징한 돼지고기의 장점이 오롯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여기서 잠시 과거의 정육점 풍경을 떠올려 보자. 반으로 갈린 돼지 몸통들이 매달려 있는 천장과 부위별 고기들이 놓인, 빨간 조명을 단 진열장. 당시 도축된 고기는 요즘처럼 뻥 뚫리지 않은 도로를 구비구비 달리고 달려 정육점에 도착했고, 소비자가 주문하는 양 만큼 잘려 신문지에 둘둘 말아 건네질 때까지 진열장에서 기다렸다. 돼지고기의 숙성은 모든 유통 과정에서 이뤄졌다. 유통 환경이 개선되면서 돼지고기는 숙성될 기회를 놓쳤다. 요즘처럼 진공 포장돼 냉장 유통되는 돼지고기는 숙성이 억제된 상태다. 유통 중 일어나던 자연스런 숙성을 이제 식당에서 ‘일부러’하고 있다.

드라이에이징 뿐 아니라, 웻에이징과 아이스에이징 등 새로운 돼지고기 숙성방식들도 등장하고 있다. 다만 돼지고기를 숙성시키는 것이 고기 맛을 실제로 끌어올리는지에 대해서는 외식업계에서 여전히 확정된 결론이 없다. 일부에서는 단지 마케팅 수단일 뿐이라는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서울 신설동 ‘육전식당’ 3호점에서 직원이 능숙한 솜씨로 돼지고기를 굽고 있다.
세 번째 화두, 전문가가 구워라

서울 신설동 ‘육전식당’은 포화 상태인 돼지고기 구이 시장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떨치고 있는 루키다. 육전식당의 돼지고기는 일반 품종이다. 냉장시설에 보관되는 동안 1주일 이내의 숙성을 거치긴 하지만, 굳이 숙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축하고 1주일 이내에 판매하기 때문에 숙성육보다는 신선육에 가깝습니다. 단, 보관 중의 관리를 철저히 합니다. 잘 숙성된 고기는 손등의 도톰한 살처럼 부드러운 탄력이 있습니다. 잘 구우면 육질에 풍미가 감돌고 육즙이 팡팡 터지죠.” 육전식당 오대성 대표의 설명이다.

육전식당이 강조하는 것은 ‘그릴링’, 굽는 기술이다. 돼지고기 굽는 온도는 220도에서 240도 사이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고기 굽는 전문가인 직원들은 소고기 스테이크 굽는 정석을 시연하듯, 정확히 겉을 지지고 속에는 촉촉하게 열기를 넣는다. 직원들은 입사하자마자 스파르타 식으로 고기 굽는 법을 배운다. 돼지고기 물성과 도축, 숙성 등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으로 교육 받는다. 정육전문가 최정락 실장이 직원 교육을 전담하고 있다. 손님이 직접 고기를 굽겠다고 나섰다가도 직원이 제대로 구워준 맛을 보고 나면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고 조용히 기다리게 된다.

육전식당의 돼지고기 목살과 삼겹살. 2.5cm~3cm 두께로 썰어 0.5cm 깊이로 칼집을 넣는다. 고기 굽는 열기가 효율적으로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다.

서민의 음식이던 돼지고기가 ‘금겹살’이 되더니, 고급화 바람까지 타고 있다. 최정락 실장은 돼지고기 고급화 트렌드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3,4년 전 시작된 돼지고기 프리미엄화는 이제 다양한 방면으로 발전 중입니다. 돼지고기 구이집들은 곁들이는 반찬과 찍어먹는 소스와 소금, 서비스 등 작은 요소들에서부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삼겹살은 여전히 서민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높은 단가에도 가격 인상이 쉽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식당들이 돼지고기는 무조건 싸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겁니다.”

우리 지갑에는 안된 일이지만, 입은 신날 일이다. 노릇노릇, 바삭바삭하게 익은 돼지고기의 구수한 풍미와 그 안의 보드랍고 촉촉한 살결은 값어치를 좀더 치르고 취해도 아깝지 않을 오랜 쾌락일지니.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Afr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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