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승화] 배역(配役)

입력
2016.12.08 16:50

인생은 예행연습을 허용하지 않는 연극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무이한 배역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와 환경을 응시하여 최적의 임무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그 임무를 소명(召命)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임무가 소명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이 맡은 바를 훌륭하고 감동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 그는 무대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해 목 놓아 노래하고, 울고, 춤추고, 웃고 그리고 사랑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이란 막(幕)이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 성탄절 연극에 참여했다. 나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나 동방박사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내게 맡겨진 배역은 마리아를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당나귀였다. 나는 친구와 당나귀 모형 가죽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머리와 앞발 역할이고 친구는 뒷다리 역할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임신한 마리아를 등에 태우고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 무대에서 요셉 흉내를 내면 연극을 망친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탄생하였다. 당시 모든 나라가, 아니 최근까지도 거의 모든 국가가 신정이나 왕정을 택했다. 민주주의라는 정치행태는 인류사의 예외다. ‘민주주의’란 용어는 사실 이런 정치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하하는 용어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철학을 ‘대중이 다스리는 정치’란 의미의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소노미’(isonomy)라고 불렀다. 그들은 민주사회 안에서 자신들이 맡은 직업을 연극의 배역(配役)으로 여겼다. 고대 그리스 지도자들은 매년 비극공연이라는 국가의례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였다. 그들은 비극공연을 관람하면서 자신의 배역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배역에 충실하지 못하고 오만에 빠져 비극의 결과를 초래하는 영웅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누구나 공정한 경쟁을 통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소노미를 남용(濫用)하는 지도자는 도편제도를 통해 아테네에서 가차 없이 10년 동안 추방하였다.

이와 관련된 고대 이스라엘 전설이 하나 있다.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솔로몬에게 능력이 출중한 베나니아라는 대신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최고의 총리로 찬양하고 심지어는 솔로몬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베나니아는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졌다. 솔로몬 왕은 베나니아의 자만심을 고치고 대신들 앞에서 망신을 줄 목적으로 불가능한 심부름을 시킨다. “세상에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마술 반지가 있다고 들었다. 그 반지는 슬픈 사람을 기쁘게 만들기도 하고 기쁜 사람을 슬프게 만들기도 하는 반지다. 그 반지를 가져오라.” 베나니아는 예루살렘 시장에 있는 모든 금세공, 은세공 가구에 들려 그런 반지를 찾아 헤맨다. 그 누구도 그런 반지를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한다.

베나니아는 우여곡절 끝에 시장 구석에서 카펫을 깔아놓고 반지를 팔고 있는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베나니아가 “값은 상관없어요. 솔로몬 왕이 인간의 희로애락조차 조절하는 반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 반지를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가난한 할아버지가 한참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카펫 안에서 아주 평범한 금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반지 안에 무엇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 노인은 “이 반지를 솔로몬 왕에게 가져가시오”라고 말하면서 반지를 건넸다. 놀란 베나니아는 그 반지를 받아 들고, 노인이 새긴 명문을 읽고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그는 반지를 들고 예루살렘 궁으로 가 왕에게 바쳤다. 솔로몬은 평범해 보이는 반지를 들어 그 안에 새겨진 명문을 읽고 얼굴이 굳어졌다. 거기에 히브리어 알파벳 g(gam), z(zeh), 그리고 y(yod)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세 글자는 ‘감 쩨 야아보르’(gam zeh yaavor)란 히브리 문장의 첫 글자들인데, 그 의미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의미이다. 솔로몬과 베나니아 모두 자신의 모든 권력, 재산, 그리고 심지어 지혜까지도 덧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흙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 문장을 자기 삶의 교훈으로 삶았다. 그가 1859년 미국 위스콘신 주 농부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동방의 한 왕이 현자들에게 자신을 일깨우는 문장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현자들은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은 문장을 주었습니다. ‘이것 역시 지나가리라!’ 얼마나 많은 것을 내포하는 문장인지. 내가 오만에 빠졌을 때, 얼마나 나를 정신 차리게 해주는지. 그리고 고통의 시간에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그는 이 마음가짐으로 1년 후인 1860년에 미국 대통령이 되고, 1862년에 미 농무부를 창설하고, 1863년에 노예해방선언문을 발표했다. 링컨은 말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의 인격을 시험하고 싶다면 권력을 주어 보십시오.” 인생이란 연극에서 나에게 주어진 배역은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최선을 요구하는 소명이 되었는가. 나의 연기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만큼 감동적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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