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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10년째 하시모토 역으로 눈도장

‘밀정’의 김지운 감독은 수많은 배우들이 탐낸 하시모토 역을 엄태구에게 맡겼고 ‘신의 한 수’라 할 탁월한 선택이었다. 최재명 인턴기자

영화 ‘밀정’ 개봉 즈음 배우들의 인터뷰 일정을 조율하던 홍보담당자가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배우 엄태구(33)를 만나고 싶어질 거라고. 그 ‘예언’은 딱 들어맞았다.

관객들 중에도 극장문을 나서며 엄태구의 이름을 검색해본 이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광기와 살기로 번뜩이던 일본 경찰 하시모토의 눈빛이 자꾸만 아른거려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을 터다. 하시모토는 항일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을 뒤쫓는 동시에 의열단에 포섭된 동료경찰 이정출(송강호)을 옥죄며 스크린을 얼어붙게 만든다. 일말의 동정심조차 허락하지 않는 악인,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 엄태구의 빼어난 연기로 빚어졌다.

엄태구를 실제로 만나면 그가 무척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데 한번 더 놀라게 된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작은 칭찬에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 영화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기쁘다”는 그의 말이 겸손이 아닌 진심이라는 걸 상기된 얼굴이 말했다. “하시모토 역할이 탐났지만 마음을 비워내고 또 비워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걸 수많은 오디션을 통해 경험했거든요. 제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역할이라고도 생각했죠. 오디션에서 김지운 감독님의 디렉션을 받는다는 자체만으로도 좋았어요. 송강호 선배님의 연기를 구경이라도 해볼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송강호를 멀리서 구경하지 말고 함께 맞붙어 연기하라는, 캐스팅 연락을 받았을 때 엄태구는 “딱 2초간 좋았고 이후론 부담감에 겁이 나 도망가고 싶었다”고 했다. 첫 촬영 전 몸무게가 4~5kg가량 빠졌고 영화를 찍으며 더 빠졌다. 스스로 “처절했다”고 말할 정도로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시모토(왼쪽)의 까끌한 목소리와 살기 어린 눈빛이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엄태구가 바라본 하시모토는 유유히 하늘을 날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단숨에 낚아채는 매 같은 인물이다. 볼이 푹 꺼져 음영이 짙어진 얼굴도 매의 집요함을 닮았다. 그렇게 하시모토가 된 엄태구는 송강호에 당당히 맞서는 배짱으로 영화의 한 축을 책임졌다. 하시모토와 이정출, 의열단의 젊은 리더 김우진(공유)이 비로소 한 자리에 모인 열차 안 장면에선 극적 긴장감이 절정에 달한다. 오롯이 엄태구의 에너지로 가공된 장면이다. 영화 초반부 동료 경찰의 뺨을 연거푸 때리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고 전하니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상대 배우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며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배우는 그 내면에 지닌 여러 성격 요소들 중 캐릭터에 맞는 하나를 극대화해 연기한다고들 한다. 집안에 출몰한 바퀴벌레에게도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 순박한 엄태구가 어떻게 하시모토를 연기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모든 촬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제 나쁜 생각은 그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치자 가슴에서 무언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어요. 하시모토의 공격성을 끌어올리려 몸부림치는 게 내심 버거웠던 모양이에요.”

그래도 촬영장에서 보낸 시간이 행복했던 건 송강호 때문이다. 긴장한 엄태구에게 다가와 농담도 건네고, 개의치 말고 편하게 연기하라고 격려했다. 송강호 얘기에 엄태구가 팬심으로 들떴다. “제가 어떻게 연기하든 선배님이 다 받아주셨어요. 선배님과 연기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무대인사 다니며 제가 선배님의 옆에 있다는 것도 신기해요.”

엄태구는 2007년 영화 ‘기담’으로 데뷔한 10년차 배우다. 친형이기도 한 엄태화 감독의 독립영화 ‘잉투기’(2013)로 이름을 알렸고, ‘차이나타운’(2014)과 ‘소수의견’(2015) ‘베테랑’(2015)으로 존재감을 새겼다.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로 쌓은 연기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이미 영화계에선 소문난 연기파다. ‘밀정’ 이후엔 ‘가려진 시간’(엄태화 감독 작품이다)과 ‘택시운전사’(또 송강호와 함께 출연한다)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먼 훗날의 계획까지는 세우지 않아요. 하루하루 삶에 충실하고 싶어요. 연기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그림 3 엄태구는 친형 엄태화 감독과 함께 ‘제2의 류승완ㆍ류승범’으로 불린다. 최재명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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