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칼럼] ‘좋은’ 종교와 ‘나쁜’ 종교

입력
2016.02.16 20:00

종교는 신(神)이 아니다. 종교에 관한 가장 심각한 오해는 종교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종교가 목적이 될 경우, 종교는 신의 자리를 대체한다. 또한, 폭력, 탐욕, 권력확장, 증오 등을 종교적 행위로 간주한다. 타자의 종교, 성별, 인종, 성적지향 등 다양한 삶의 조건들이 자신과 다를 때, 그 ‘다름’은 틀린 것이고 악한 것이 되기도 한다. 여타의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인간의 제도적 산물이다. 종교가 한 사회에서 그 존재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연민, 배려, 평등, 평화, 정의, 책임, 연대, 포용, 사랑 등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치열한 씨름을 통해서일 뿐이다. 종교란 유한한 인간 너머의 가치들인 무조건적 사랑, 평화, 연민, 연대, 책임성의 실천적 의미를 살아내기 위한 수단이고 통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류의 역사에서 두 가지 상충적인 역할을 해 왔다: 억압자와 해방자.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노예제도, 인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자 혐오, 타종교 박해 등 다양한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억압자 역할을 해 왔다. 동시에 그러한 폭력과 혐오를 넘어서서 평등, 평화, 정의, 해방을 확장하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종교가 행사하여 온 이러한 두 가지 상충적 기능을 ‘나쁜’ 종교와 ‘좋은’ 종교라는 단순한 범주로 나누어 보자.

폭력적이고 억압적 역할을 하는 종교는 ‘나쁜’ 종교이다. ‘나쁜’ 종교는 공공의 선보다는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이득 확장에 집중하며, 신의 이름으로 증오, 배제, 폭력의 문화를 확산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자기 이득을 확장하기 위한 모든 행위는 ‘급진적 악’이다. 반면, 평화, 정의, 사랑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종교는 ‘좋은’ 종교라고 명명할 수 있다. 하나의 같은 종교 안에서 이러한 두 상충적인 모습들은 공존하기도 한다.

성당과 절에서 성모상과 불상을 파괴하는 종교인, 가부장제적 가치들을 신적 질서로 옹호하고 성차별적 제도와 가치를 절대화하는 종교인,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를 저주하는 종교인, 이슬람교도들을 모두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증오하는 종교인, 세월호 유족들의 고통의 현장에서 그들을 향해 비방과 증오를 일삼는 종교인들이 있다. 이러한 ‘나쁜’ 종교는 타종교 배타주의, 가부장제, 타인종 혐오, 성소수자 혐오, 장애인 혐오 등의 가치를 종교적 신념이나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빈곤과 질병 속에서 고통 당하는 약자들을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이들로 간주하는 자본주의화 된 가치를 ‘신적 진리’라고 확산한다. 물질적 번영과 성공을 신의 축복으로 굳건히 믿고 있는 것이다. ‘나쁜’ 종교는 이러한 왜곡된 가치들을 절대화하면서 폭력과 증오의 문화를 확산한다. 결국,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면서 ‘무신(無神)의 종교,’ ‘반신(反神)의 종교’로 전이되는 것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라고 간주되는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종교는 인류사회에 폭력과 전쟁을 불러일으키면서 인류에게 해로운 ‘독’과 같은 역할을 했다. 따라서 종교가 없었다면 인류는 훨씬 더 평화로웠을 것이라면서, 종교가 신의 이름으로 행한 역사적 사건들을 그 예시로 든다. 자살폭탄 테러, 9ㆍ11, 마녀화형, 십자군전쟁,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라고 간주하였던 유대인 박해, 명예 살인, 북아일랜드 내전, 이슬람 무장단체 (ISIS), 대량학살 등 인류 역사 속의 무수한 살상, 전쟁, 폭력은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이와 같은 종교비판을 무신적이라고 비방하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종교를 종교다운 종교로 만들기 위하여 이러한 ‘종교무용론’에 대한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 종교가 이렇게 불의, 폭력, 혐오, 전쟁을 일으키는 억압자 폭군의 역할을 해 오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조명 없이, 이 21세기에 종교는 그 존재의미를 공적 공간에서 찾기는 매우 어렵다.

권력만 가졌다 하면 그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따라서 언제나 정의롭고 평화적이기만 한 종교는 없다. 한 종교 안에서도 억압과 해방의 그 상충적 기능이 공존하고 있다. ‘종교란 책임성에 관한 것이다’라고 하는 자크 데리다의 종교규정은 전쟁, 폭력, 빈곤, 난민, 차별, 증오의 문제가 더욱더 심각해지는 이 시대에 중요한 통찰을 준다. ‘좋은’ 종교는 타자들에 대한 책임, 환대, 포용, 연민, 연대, 평등, 평화, 정의의 가치를 실천하고 확산하고자 한다. ‘좋은’ 종교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모든 종교인의 절실한 과제이다. 종교 자체가 목적이 아닌 종교인들, 신에 대한 사랑이 타자들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이해하는 종교인들이 바로 ‘좋은’ 종교를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종교란 절망적인 세계에 희망과 생명 사랑에의 열정을 확산하고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종교 없는 종교,’ 또는 ‘종교를 넘어서는 종교’와 같은 표현들은 사랑과 희망과 책임성을 실천하는 수단으로서 종교의 존재의미를 강조한다. 생명 사랑의 부름으로서의 종교, 나와 다른 타자들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와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으로서의 종교야말로, 이 무신의 시대에 진정한 신-사랑의 의미를 실천하는 ‘좋은’ 종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존 카푸토의 말처럼 ‘종교란 사랑하는 이들(lovers)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타자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신을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폭력의 시대라고 명명되는 이 21세기에, 타자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나쁜’종교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서, 자신과 동질성을 나누지 않는 다양한 타자들에 대한 포용, 환대, 그리고 연대를 나누는 ‘좋은’ 종교로의 이행을 단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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