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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로 제주에 발 묶인 한국일보 기자의 공항 사투기

23일 제주 전역에 한파주의보가 발효된 가운데 대설로 인해 항공기가 결항된 제주공항. 제주=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계획대로라면 23일 오후 1시 25분 제주항공 비행기를 타고 진작 집에 왔어야 했다. 지금 난 제주항공은 구경도 못한 채, 마치 좀비물이나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주공항에 갇혀 버렸다. 실속 없이 부지런을 떤 탓에 사람 대신 여행가방만 비행기에 탑승했다. 항공편 지연 소식에 이어 결항 소식이 전해지면서 공항 카운터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휴가 복귀를 앞두고 난처한 신세가 됐다는 생각도 잠시, 속속 장기전 채비를 갖추는 사람들을 보면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난 영화는 현실에 기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됐다.

1월 23일 200여대의 항공기가 결항된 제주공항 전경. 제주=김형준기자
콘센트를 사수하라! 카트를 점령하라!

23일 오후 3시. 복귀 항공편 티켓팅에 사활을 걸고 있을 때 휴대폰이 먹통이 됐다. 이용자가 폭주한 탓이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후 5시 공항에 “금일 항공기는 전편 결항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콘센트 쟁탈전이 시작됐다. 충전구역은 말할 것도 없고, 벽과 화장실 등 플러그를 꽂을 수 있는 곳엔 어김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휴대폰 배터리 긴급수혈을 마친 사람들은 누울 자리, 아니 기댈 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 중 공항 카트는 의자의 대체재로 인기 만점이었다. 사람들은 기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등을 기대 앉았고, 그렇게 공항 벽면은 거대한 인간띠로 변했다.

23일 제주지역 폭설로 많은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 내 휴대폰 충전 카운터에의 모습. 제주=김형준기자
24일 출발 예정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에 수백명의 승객이 대기 발권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김형준기자
편의점 습격사건

물론 진짜로 누군가가 종업원을 위협해 편의점을 턴 건 아니다. 하지만 매대만 보면 오해할 법하다. 통신 장비와 휴식 공간을 마련한 이들은 식량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오후 6시. 이젠 허기가 찾아올 시간이었다.

1층 편의점은 웬만한 물건은 다 동이 났다. 도시락, 컵라면, 즉석밥, 삼각김밥, 샌드위치 등이 있어야 할 식료품 코너 매대는 진작에 텅텅 비었고, 과자와 음료수는 사재기 행렬 앞에 속수무책으로 재고까지 탈탈 털렸다. 칫솔, 치약, 여성용품, 면도기 등 생활용품도 씨가 말랐다. 3층의 던킨도너츠도 더 이상 팔 수 있는 제품이 없었다. 몇일치 매상을 몇 시간 만에 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얼마 후 공항에 생수 수십 박스가 조달됐다. 당연히 턱없이 부족했다. “한 명당 1개씩”이라고 외쳤지만, 귀가 잘 안 들리는 일부 사람들은 ‘한 손당 1개씩’, 혹은 그 이상으로 챙기기도 했다.

24일 출발 예정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 내 식료품 판매대가 텅 비어있다. 제주=김형준기자
23일 제주지역 폭설로 많은 항공편이 결항된 가운데 제주국제공항 관계자들이 결항 승객들을 위한 생수를 나르고 있다. 제주=김형준기자
“어떻게든 여길 빠져나가야 해”

어둠이 내려앉은 후 사람들은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공항에 갇혀 멍 때리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간 오늘 밤을, 아니 어쩌면 며칠밤을 공항 노숙인으로 지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후 7시. 공항 벽을 따라 인간띠를 이루던 사람들은 버스와 택시 정류장으로 몰려들었다. 버스정류장은 포화상태였고, 택시정류장엔 100m 넘게 늘어선 사람들만 와글거릴 뿐 택시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택시 대기 줄 맨 앞에 기다리던 사람은 공항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2시간째 추위와 사투 중이었다.

23일 제주지역 폭설로 많은 항공편이 결항된 가운데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길을 돌린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몰려있다. 제주=김형준기자

버스가 한 대 들어왔다. 어림잡아 수백명이 버스로 몰려들었다. 그 아수라장에서 외마디 비명들이 터져나왔고, 누군가는 “어딜 가든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이게 현실인가 영화인가. 그리고 터질 듯이 승객을 태운 버스는 눈길을 위태위태 헤쳐 나갔다. 두 다리가 튼튼한 나는 다행히도 50분을 걸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 샌 항공사 직원, 비행기에 6시간 갇힌 승객… 공항에서 만난 사람들

24일 일요일 비행기는 모두 예약이 차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 일찍 공항에 가서 대기번호라도 받으려고 했지만 눈보라가 워낙 심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2차 시기에는 택시를 만날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오늘 제주도 택시의 10%도 운행을 안 한다”며 “젊은 기사들이라도 움직이자고 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했다. 23일 상황의 재탕이었다. 한 청년은 뜨거운 물을 못 구해 컵라면을 부숴 먹고 있었다. 공항의 모든 카트는 의자로 변신했다. 대기번호를 받기 위한 행렬은 끝이 없었고, 꼬박 밤을 샜다는 제주항공 직원은 24일 오전에도 뭔가 바쁘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24일 출발 예정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에서 한 승객이 컵라면을 부숴 먹고 있다. 제주=김형준기자
24일 출발 예정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에서 항공사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제주=김형준기자

23일 오전 11시30분 부산행 에어부산 비행기에 탑승했던 한 승객을 만났다. 11시50분에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제빙작업을 한다기에 그 상태 그대로 4시간을 기다렸단다. 이미 일본은 왕복으로 다녀왔을 시간이다. 그러더니 비행기가 활주로로 이동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불만 따윈 눈 녹듯 사라지려는 찰라, 비행기는 다시 활주로 위에 우두커니 멈춰 서버렸다. 그리고 1시간 30분이 더 흘렀다. 공항에서 ‘모든 항공편 결항’공지가 방송되고 나서야 비행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희망고문’에 시달리며 6시간이나 좁아터진 비행기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이 와중에 중국 관광객들과 항공사 측은 숙소 제공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단다. 시원찮은 통역 탓에 의사소통은 답답한데, 항공사도 여행사도 확보해 놓은 숙소는 없으니 언쟁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새벽 2시까지 3시간 동안 공항 한 편에선 목청 높은 중국어가 울려 퍼져야만 했다.

오후에 접어들자 공항 분위기는 한층 차분해졌다. 25일 오전 9시까지 예정된 항공편이 결항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속속 인근 찜질방이나 제주시 외곽의 숙소를 잡아 이동하는 관광객들이 늘었다. 공항에 남은 사람들은 잔잔한 동지애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고 쟁여 둔 간식을 나눠 먹는 훈훈한 장면이 펼쳐졌다.

제주=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24일 출발 예정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에서 한 승객이 이동 카트에 앉아 있다.
24일 출발 예정된 모든 항공편이 결항된 제주국제공항에서 한 승객이 눈 덮인 활주로를 바라보고 있다. 제주=김형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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