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칼럼] 용서를 연습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15.12.29 10:54

12월은 유독 두 종류의 시간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연말과 새해라는 달력 속의 ‘크로노스(chronos)적 시간’과 의미와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카이로스(kairos)적 시간’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하는 달이 12월이다. 사실상 달력 속의 시간이 본질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창출하고자 하는 내면적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는 회상과 성찰의 시간에 되돌리거나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두 요소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과거의 비극적인 일들로부터 과거를 구해내는 가능성으로서, 인간의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미래에 대한 약속’들에 연결시켜서 살아가는 능력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끌어안으면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삶에 자신을 기투(企投)하는 약속을 하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 규정들로 구성되고 있는 우리의 삶을 의미롭게 만드는 중요한 밑거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거에 대한 ‘용서’와 새로운 미래와의 ‘약속’은 삶에서 매우 중요한 두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용서에는 자기 용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의 용서, 집단적 용서, 정치적 용서, 종교적 용서, 형이상학적 용서 등 여러가지가 있다. 사실상 우리 현실에서는 용서와 같은 중요한 가치가 너무나 가볍게 남용되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경험하곤 하는 ‘용서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용서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가.

첫째,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기성, 교만, 욕심, 권력과 소유에의 욕구 등으로 인하여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피해를 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연민, 사랑, 환대를 베풀기도 하는 존재이다. 정도에 따른 상이성이 있지만, 이 두 상충적인 품성들은 대부분 모든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 그렇기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타자의 ‘악한 품성’들이 작동되는 현실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악한 품성들이 개인적 또는 제도적으로 작동될 때의 결과는 가해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폭력적이다. 한 개별인이 자기 용서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이유도 바로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은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장 뤽 낭시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함께-존재’라고 표현한다. 함께-존재로서의 인간은 출생부터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타자들과의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지극히 부정적인 경험도 하게 한다. 상처와 피해를 주고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함께-존재로서의 인간이 용서에 대하여 성찰하고 연습해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인간은 다양한 제도들과 연계되어 살아가는 ‘제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족, 학교, 회사, 종교, 국가 등 다양한 제도들과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은 그 제도들에 의하여 보호와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하기도 한다. 다양한 제도들을 만들고 그 제도 속에서 공동의 세계를 형성하며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이란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폭력과 억압의 현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개별인들 간의 용서만이 아니라, 집단 간의 용서나 정치적 용서 등이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인간의 세 가지 삶의 조건들은 언제나 각기 다른 종류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게 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 또한 한 사람이 한쪽에서는 피해자이면서, 다른 차원에서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복합적인 현실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이렇게 피해와 가해가 교차하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 과거를 넘어서서 현재와 미래적 삶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용서란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용서의 행위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용서란 불의한 일들에 대한 묵인이나 망각이 아니며 또한 그 불의한 일들에 대한 분노조차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형이상학적 용서’라고 불려지는 용서의 차원도 중요하다. 죽음, 질병, 육체적 쇠퇴, 또는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서로가 주고 받는 다양한 상처와 폭력, 또는 도덕적 악이 난무하는 이 세계 속에 살아가면서 인간은 이러한 불완전성의 세계를 용서하는 것도 필요하다. 형이상학적 용서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인간됨과 내면세계가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내 주변에서,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과 대면하고 개입하면서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나 자신의 관계’이다.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들로 인해 자신 속에 자신도 모르게 쌓이는 부정적인 삶의 에너지로서의 ‘르상티망’이 나의 내면세계 속에 축적될 때 나의 인간됨은 부식되고 파괴되기 쉽다. 형이상학적 용서가 중요한 이유이다. 형이상학적 용서는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나’의 인간됨을 지켜내기 위한 중요한 터전을 마련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 해를 매듭짓고 새해를 맞이하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적 시간의 교차점에 우리는 서 있다. 이제 과거를 넘어서는 가능성으로서의 용서, 그리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끌어안으며 새로운 삶으로의 기투를 하는 약속을 통해 우리는 우정, 사랑, 정의, 연대, 평화 등 인간의 지순한 가치들이 실현되는 ‘순간의 경험들’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의 경험들이 어두운 절망적 현실 속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줄기 역할을 하면서 우리 삶을 의미롭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