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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丁若鏞ㆍ1762~1836)은 뚜렷한 스승이 없었다. 부친 정재원에게 배웠지만 이는 양반 사대부가 가학(家學)의 전통이지 정식 사제관계는 아니었다. 정약용 자신은 환갑 때 지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성호 이익(李瀷ㆍ1681~1763)을 사숙(私淑)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저작 등을 통해 배웠다는 뜻이다.

정약용은 자신이 서울에서 세 살고 있을 때,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李家煥)과 자형 이승훈(李承薰) 등이 모두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 나가고 있었다”면서 “그래서 나도 그 남기신 글들을 구해 보고는 기쁘게 학문에 뜻을 두었다”(‘자찬묘지명’)라고 말했다. 다산학(茶山學)이란 한국 실학사의 금자탑의 수원지는 이익의 학문세계였다는 뜻이다.

이익은 정약용처럼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성호사설’ 등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 자기 생각을 밝혀놓았다. 두 사람은 모두 그릇된 사회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사의 강토관에 관한 부분에 이르면 견해가 달라진다. 이익은 강토관에 대한 저서를 따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성호사설’ 곳곳에 한국사의 강역에 관한 글을 남겼다.

‘두만강으로 경계를 다투었다’는 ‘두만쟁계(豆滿爭界)’에서는 “전조(前朝ㆍ고려) 때 윤관이 세운 비(碑)가 선춘령(先春嶺)에 있고,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에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지난 번 국경선을 정할 때 두만강의 원류(源流)만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고려 예종 때 윤관이 두만강 북쪽 700리의 선춘령에다 고려의 강역이라는 뜻의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을 세웠는데, 숙종 38년(1712) 청나라와 국경선을 획정할 때 왜 이 비석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두만강의 원류만을 찾아서 토문(土門)이라고 했느냐는 비판이다. 송화강의 한 지류인 토문은 지금의 사도백하 다음의 오도백하를 뜻하는데,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삼아도 그 동쪽 간도 지역은 조선 영토가 된다. 그러나 이익은 왜 윤관의 선춘령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느냐고 비판한 것이다.

이익은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웠다는 낙랑, 현도, 임둔, 진번 등의 한사군(漢四郡)에 대해서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이익은 “한(漢)나라가 (고)조선의 땅을 취하여 사군(四郡)을 만들었으니 사군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흔히 삼조선을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이라고 하는데, 고려 후기 유학자들은 은(殷)나라 출신 기자(箕子)가 평양으로 왔다고 막연히 생각해서 기자 사후 1,400여년 후 평양에 기자묘를 만들었다. 그 후 평양에 위만조선과 낙랑군이 들어섰다고 생각했고, 조선 유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익은 이런 관점을 거부했다. 이익은 ‘삼국사기’ 고구려 동천왕 20년(246)조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邱儉)이 현도로 침범해서…낙랑으로 퇴각했다”는 기록을 보면 낙랑군은 평양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관구검이 퇴각한 낙랑이 평양이라면 관구검은 수백 척의 배를 만들지 않는 한 군사를 데리고 중국 북방에 있던 위나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는 반면 ‘삼국지’ ‘위서(魏書)’ 가평(嘉平) 4년(252)조에는 관구검이 진남(鎭南) 장군이 되어 남방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서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익은 한사군이 한반도 내가 아니라 고대 요동(遼東) 지역에 있었다고 갈파했는데, 실제로 중국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를 비롯한 여러 중국 기록들은 낙랑군이 현재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익이 이처럼 ‘낙랑군=평양설’을 깼지만 그러나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낙랑군을 평안도와 황해도로 보는 기존의 시각을 받아들였다. 정약용도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지금 사람들 중에 낙랑의 여러 현들이 혹시 요동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요동설도 썼지만 끝내 유학자의 기존 시각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성호와 다산 사이에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부친의 유배지였던 평북 운산에서 태어난 이익은 둘째 형 이잠(李潛)이 세자(경종)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 32년(1706) 사형 당했다. 정약용은 개혁론자였지만 기본적으로 체제 내의 사람이었다. 반면 과거길이 막힌 이익은 기존 유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함석헌 선생의 표현대로 ‘들사람 얼’의 눈으로 사물을 보았다. 고기 먹는 벼슬아치들에 자신을 빗댄 ‘콩 먹는 사람의 걱정’이란 뜻의 ‘곽우록(藿憂錄)’은 이런 사고의 소산이다.

지금 여러 부분에서 한계에 부딪친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익처럼 방외(方外)의 사고, 즉 기존 체제의 틀에서 벗어난 ‘들사람’의 시각이 필요하다. 한계에 봉착한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길도 성호 이익처럼 체제 밖 사람들의 사고에 있을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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