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향기] 광야에서의 공부

입력
2015.05.24 13:01

올망졸망한 산과 들이 펼쳐진 조선 땅에 살던 선비들은 중국으로 여행을 하다가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박지원(朴趾源)은 1780년 7월 8일 요동 벌판을 보고 호곡장(好哭場)이라 부르면서 가히 한 번 울 만한 곳이라 하였다. 갓난아이가 갑갑한 태중에 있다가 세상으로 나와 첫울음을 터뜨리듯, 박지원은 드넓은 세상을 처음 보고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1803년 홍석주(洪奭周)도 요동 벌판을 지나가면서 “남들과 다투는 자는 옳고 그른 것의 마땅함을 밝힐 수 없고, 사물에 가려진 자는 좋고 나쁜 것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몸이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800리 요동의 들판은 아무리 가고 또 가도 그 지세를 알 수 없었다. 그 자신이 바로 들판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월봉(月峰)이라는 높다란 언덕이 있어 그 위에 오르고서야 광활한 요동 땅을 바로 볼 수 있었다. 이에 송(宋)의 학자 정호(程顥)가 이른 “몸이 마루 위에 있어야 마루 아래 있는 사람의 시비를 가릴 수 있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홍석주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831년 요동 벌판을 지나다가 다시 월봉에 올랐다. 바람에 흙먼지 날려 예전처럼 시야가 트이지 않은데다, 서북으로 큰 산이 많아 멀리까지 조망할 수 없었고 동쪽은 지세가 울퉁불퉁하여 가려진 데가 많았다. 남쪽은 트였지만 시력의 한계로 바다까지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요동의 벌판이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번 월봉에 올라 “내가 이제부터 하늘이 나를 위한 덮개임을 알겠고 땅이 나를 위한 수레임을 알겠구나. 해와 달은 돌고 돌면서 그 가운데 나타났다 사라지는구나”라 호탕한 말을 뱉은 것을 생각하고 쓴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동방에서 태어나 광야를 본 적이 없기에, 처음 요동에 이르면 눈이 어찔하고 마음이 놀라서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이제 이러한 것이 지나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개 몸이 사물의 바깥에 있으면 마치 가려진 바가 없게 된 듯하다. 그러나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의 차이 때문에 눈과 귀가 그로 인하여 바뀌게 되곤 한다. 이 때문에 예전 일을 처리하는 자들이 정밀하게 살피고 거듭하여 익히는 것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낯선 것을 처음 대하면 대단한 것을 보았다고 여기지만 여러 번 보게 되면 심드렁해진다. 홍석주는 요동 들판이 평지로만 되어 있지 않거니와 세상에는 요동보다 더욱 넓은 평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른 인식을 얻기 위해 정밀하게 살피는 정찰(精察)과 거듭하여 익히는 숙복(熟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다 널리 보는 박관(博觀)까지 겸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홍석주는 요동 벌판을 지나면서 한 공부를 ‘월봉에서 광야를 바라보면서(月峰望野記)’에 담았다. 높은 곳에 올라야 바로 볼 수 있고 여러 번 보아야 잘못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깊이 헤아려 토론을 한다는 난상토론(爛商討論)의 뜻을 알지 못해서일까, 온 나라가 좁고 가벼운 생각이 어지럽게 넘쳐나는 난장(亂場)이 되었다. 이런 난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벌판에서 빠져 나와 높은 언덕에 올라야 형세가 보인다. 18세기 문인 서종화(徐宗華)는 “당인(黨人)이 그 잘못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이 여산(廬山) 안에 있기 때문이니 마루 위에 있어야 마루 아래의 시비를 분별할 수 있다”라고 했다. 소동파(蘇東坡)가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으니,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네”라고 한 명구를 끌어들인 말이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 그래서 바다를 본 사람은 웬만한 것을 물이라 하기 어렵다”라는 ‘맹자’의 말도 홍석주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태산에 올라야 천하의 정세를 알 수 있고 바다를 보아야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자신이 본 동산과 개울만 크다고 할 것이 아니다. 정찰과 박관, 숙복의 정신으로 높은 곳에 거듭 올라 멀리 바라보고자 할 때 마음의 난장과 세상의 난장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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