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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무르(Amour)는 음악가의 죽음을 쫓는다. 그러나 감정의 범람을 유도하지 않는다. 배경음악의 사용은 서늘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그래도 첫 장면만큼은 음악을 가장 앞선 자리에 내어 놓는다.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음악회의 객석을 비추는 특수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카메라는 무대를 향하고 있지 않다. 프레임 안 청중의 시선과 프레임 밖 관객의 시선은 서로 마주하며 부딪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연주를 듣는 객석의 ‘총량’은 프레임 안팎을 아우르며 어느새 두 배로 확장된다. 감독은 이 상황에서 슈베르트의 ‘다단조 즉흥곡 Op.90-1’을 의미심장하게 들려준다. 장중하고도 애달픈 비감이 서려있는 슈베르트의 선율은 이미 두 배로 증폭된 청중과 관객의 집중력을 영화 속 이야기로 서서히 이끌고 들어간다.

작곡가가 조성을 ‘다단조’로 선택할 때 그 슬픔의 무게는 일상적이지 않기 마련이다. 단기간에 극복 가능한 사소한 상처를 표현하려 했다면 다른 평범한 조성이 선택됐을 것이다. 다단조는 종종 운명의 불가항력이나 죽음 너머의 세상을 내포한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나 슈베르트의 유작 소나타(D.958),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등이 이 범주에 힘을 보태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이 곡에서 슈베르트는 다단조의 ‘딸림음(솔)’을 내뱉으며 선언하듯 시작한다. 음역을 달리해 4옥타브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지만, 딸림화음의 다른 구성원(시와 레)은 등장하지 않아 텅 비어있는 공간감을 배가시킨다. 다른 구성원과 함께 공간을 채웠더라면 혹은 통상의 시작과 같이 으뜸음(도)으로 정체성을 밝히며 안정되게 시작했더라면 곡의 느낌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삼키기보다는 내뱉는 표현이고, 주저앉기보다는 떠나라 부추기는 울림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악절은 영화의 주인공 안느와 조르쥬를 상기시킨다. 당분간 선율은 여인이 앞서고 남자가 뒤따르는 형식을 취한다. 여인이 애달피 노래하면 남자가 따뜻이 품어 받는다. 여인이 딸림화음으로 질문하면 남자가 으뜸화음으로 대답한다. 이때 여인과 남자는 똑같은 선율을 ‘부점 리듬’을 통해 읊조리지만 어조는 각기 다르다. 가냘프고 창백한 여인은 자신의 길이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자는 여인의 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삶의 긍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여인에게 엄습한 죽음의 공포를 남자는 용기 있게 대적하기도 한다.

슈베르트는 어둡게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를 종종 ‘셋잇단음표(triplet)의 연타’로 표현하곤 했다. 이를테면, 가곡 ‘마왕(Erlkonig)’에서 소년을 엄습해 오는 죽음의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매개체는 삼연음부의 반복음이다. 다단조 즉흥곡에서도 셋잇단음들은 여인과 남자의 선율을 집요하게 따라 붙는다. 여인의 몸은 전염이 퍼져나가듯 딱딱하게 마비되고, 정신은 망각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한다. 남자는 여인에게 스며드는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뚱이를 들어올려 휠체어에 앉히고 머리를 감기며 미음을 먹이고 속옷을 갈아 입히며 옛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죽음의 사슬을 끊는다. 자신을 그만 포기해도 좋다는 여인의 당부에 남자는 늘 반문해 온 터였다. “당신이 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은 현란한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들을 지탱해온 것은 행동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절망을 제 손으로 거두는 것도 사랑의 정당한 실천일지 모른다. 음악 역시 반음계의 급격한 하행을 통해 고통의 굴레를 벗어난다. 두 노인이 마지막 외출을 떠날 때, 음악은 피안의 세계에 도착한다.

해로동혈(偕老同穴),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의미이다. 생사를 함께 한 노년의 사랑과 슈베르트의 비감 어린 선율은 그렇게 침묵으로 수렴되어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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