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연의 사이아트] 과학영화 붐에 모자란 2%

입력
2015.02.22 14:31

영화로 새삼 주목받은 앨런 튜닝

기계와 인간 사고의 차이에 주목

과학은 명암 두루 스토리텔링 소재

설 연휴는 사흘이었지만 개인에 따라선 무려 열흘 가까운 장기 연휴를 즐긴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골든 연휴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적어도 금년에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연휴 분위기에서 깨어나 평상시 생활로 돌아가자. 어느 매스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에 으레 하는 차례 상 차려놓고 절하기 빼곤 연휴 기간 동안 가장 대중적인 일은 1위 낮잠 자기, 2위 영화관람, 그리고 3위 여행이란다. 필자도 이 통계자료에 맞춰 세 가지를 모두 다 했다. 영화도 무려 세 편이나 관람했다. 하나는 스파이 액션 영화, 두 번째는 예술가 반고흐의 일생을 그린 영화, 세 번째는 오늘 이 글의 소재인 수학자 앨런 튜링의 일생을 다룬 영화다.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이 영화는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에 관한 이야기다. 아카데미상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8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돼 있다고 한다. 튜링의 과학적 업적과 사생활에 대해서는 지난해 칼럼에서 다룬 적도 있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 독자들을 위해서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기계를 개발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으나, 과학계에서는 컴퓨터의 수학적 모델을 세운 인물로 더 알려져 있다. 오늘날 컴퓨터 분야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상도 튜링상이라 명명해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많은 천재들이 그랬던 것처럼 튜링도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고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데, 침대 옆에는 한 입 깨문 사과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튜링의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회사 로고로 채택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정작 잡스 본인은 이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로 세상을 등졌으니 알 길이 없다. 튜링의 사과는 성경 창세기의 사과, 뉴턴의 사과와 더불어 사과에 관한 3대 전설로 내려온다.

미국의 미셸 오바마가 어떤 자리에서 이 ‘이미테이션 게임’을 언급했다. 동성애자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깨는 용감한 영화라고 말이다. 튜링은 20대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명문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임용되고 2차 세계대전에 공을 세웠지만, 당시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따라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를 특별사면 했다.

동성애와는 거리가 멀지만 사후에 사면 받은 과학자는 그가 처음이 아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했던 갈릴레오는 허위사실 유포죄로 가택연금과 함께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죽은 지 400년 만에 교황청으로부터 사면 받았다. 우리도 특별사면은 국민화합 차원이 아니라 개인 명예회복 차원에서 당사자 사후에만 실시하면 어떨까.

이 세상엔 풀지 못하는 암호는 없고, 영원히 감출 수 있는 비밀도 없는 것 같다. 나치 독일의 암호기 역시 그 당시 기술로는 풀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것이었으나 튜링은 이걸 푸는 기계를 만들었다. 사실 웬만한 암호를 풀려면 거의 무한대의 경우 수를 하나하나 적용해봐야 하고 이건 수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계좌와 패스워드, 이중삼중으로 철벽 보안되어 있는 보안 시스템이 뚫리는걸 보면 인간의 뇌는 컴퓨터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음에 틀림없다. 영화에서도 앨런 튜링은 이런 말을 한다. “기계도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는가는 질문은 적절하지 못하다.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르냐가 더 흥미있는 질문이다.”

요즘 들어 과학자 개인을 다룬 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을뿐더러 꽤나 히트치고 있다. ‘인터스텔라’도 실상 과학자 부녀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에는 천체물리학자 스티브 호킹을 다룬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이 있었고 국내에서는 황우석 교수 이야기를 다룬 ‘제보자’가 있었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자가 주인공 역할을 하는 영화이건만 연구성과 짜맞추기 등 과학자로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예술은 현실 세계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학에는 어두운 면이 있는 만큼 또한 밝은 면이 있다. 이걸 잘 발굴해서 스토리화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과 과학의 윈-윈 전략이다. 다음에는 롤모델까지는 아니더라도 에너지 넘치고 익사이팅한 대한민국 과학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를 기대해 본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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