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수 칼럼] 정규직 수난시대의 개막

입력
2014.12.09 20:00

짙어지는 집단적 불행시대

정규직 과보호 논리는 궤변

폭주하는 시장논리 제어해야

불행인구가 늘었다.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는 이가 수두룩하다. 해가 갈수록 더 늘어나는 분위기다. 집단적 불행호소다. 현실빈곤과 미래불안의 악순환이 불행판정의 유력근거다. 돈 때문이다. 돈과 행복은 연결된다. 일정자산(소득)을 넘기면 금전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지만 예외도 많다. 적어도 돈이 불어나면 행복하고, 적어지면 불행한 건 맞다. 절대빈곤 시절 행복감이 높았던 건 오늘보다 내일의 지갑사정이 더 좋아질 걸로 믿은 덕분이다. 현대불행은 그 희망상실의 결과다.

더 벌 희망은 감소했다. 맵고 찬 현실 앞에 좌절인생이 넘쳐난다. 버티기조차 힘들다. ‘빈곤인구→불행증가’다. 괴롭고 고단한 밥벌이에게 중산층 운운은 무의미하다. 언제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은 빈곤후보 신세다. 질병ㆍ해고 등에 봉착하면 줄줄이 한계인구로 편입된다. 버텨낼 재간은 없다. 상황은 더 나빠진다. 저성장ㆍ고령화ㆍ재정난 등 미증유의 거대악재가 줄줄이 대기한다. 기업은 적자생존ㆍ승자독식에 사활을 건다. 동참불능이면 ‘효용종료→폐기처분’이다. ‘줄이고 잘라서’의 고용이 득세할 우려다.

정규직 과보호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고임금ㆍ고복지의 부담스런 정규직 우대환경을 완화하자는 정부논리가 불을 붙였다. 즉 해고요건을 낮춰 기업의 채용의지를 높여주자는 제안이다. 그러면 고용유연성도 확보된다고 거든다. 아무리 뜯어봐도 그럴싸한 연결고리가 전무하다. 해괴하고 기묘한 궤변이다. 정규직 보호막은 분명 있다. 대기업ㆍ거대노조가 중심이 된 귀족노동이 있지만 일부 사례다. 대부분은 정규직일지언정 보호망이 성글고 가늘다. 과보호는 거의 없다. 진단실패다.

진정 이렇듯 판단했다면 순진하다. 무능을 질타할 수밖에 없는 능력부족, 임무방기다. 아니면 기득 야합적인 본색노출, 편견확인과 다름없다. 노노갈등을 부추겨 손 안대고 코 풀려는 시장원리적인 기획물과 같다. 비정규직의 불행원인을 정규직의 우대보호로 떠넘기려는 절묘한 논리발굴인 까닭이다. 그럴싸하지만 여기까지다. 이후엔 살림살이가 한층 나빠질 게 명약관화다. 기업은 웃어도 직원은 울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정규직’은커녕 ‘정규직→비정규직’만 심화될 게 확실시된다. 공멸이다. 비정규직화를 경험한 그간의 학습효과도 거든다. 고용시장의 하향평준화 염려다.

일자리가 복지다. 지금처럼 단발적인 돈 몇 푼만으로 복지는 해결불가다. 근원처방은 장기ㆍ안정적인 근로소득 확보다. 최고수준의 복지란 곧 정규고용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정부재원을 아끼는 첩경이자 만능열쇠다. 하물며 비정규직의 양산혐의가 뚜렷한 길을 걷겠다니 어불성설이 따로 없다. 정규직 보호막이 두터운 게 아니라 비정규직 보호망이 워낙 없다는 게 갈등요지다. 상대적으로 좀 나아 보인다고 전선확대의 무리수를 둬선 곤란하다. 잘못된 판단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이대로라면 정규직 보호막이 훼손될 여지가 적잖아 보인다. 정부의 국정철학이 노동보다 자본에, 사회보다 시장에 방점을 찍은 이상 되돌리기란 역부족이다. 정부도 이번 건을 논쟁거리로 끝낼 요량이었다면 꺼내지도 않았을 터다. 서민증세로 해석되는 담뱃세도 똑같은 경로를 밟았다. 이로써 정부가 기업ㆍ시장편이라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 정부지원까지 얻어냈으니 기업선택은 뚜렷해졌다. 자본향유를 위한 이익독과점의 실천이다. 기업은 한가하지도, 우매하지도 않다. 하물며 배까지 고프다니 경비절감에 유리한 고용압박은 당연지사다. 고용불안에 따른 불행증가의 예고다.

시장은 복지를 풀기 어렵다. 공동체를 위한 자체조정도 힘들다. 폭주하면 제어할 수 없다. ‘비정규직→정규직’은 불가능한 희망사항이다. 폴라니의 비유처럼 ‘사탄의 맷돌’에 속도가 붙었다면 과장일까 싶다. 상품화돼서는 안 될 노동, 토지, 화폐조차 일찍이 거래시킨 게 시장능력이니 앞날이 두려울 따름이다. 저지 방책은 미약하다. 능력도 의지도 부족한 대의민주제의 한계다. 좌든 우든 정치우산 밑에 초록은 동색일 뿐이다. 이로써 희생양은 불어날 전망이다. 즉 정규직 수난시대의 도래다. 우울하고 무력한 세밑이다. 한국사회는 왜 이토록 자립을 위한 고립을 강요할까.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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