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 칼럼] 문(門)들이 묻는 몇 가지 질문

입력
2014.09.30 20:00

문이 가진 수많은 얼굴

통로 역할 하는 문 돼야

문 바꿔 삶 높이는 계기로

하루를 지내면서 몇 개의 문을 만날까? 아침 출근 때만 생각해보자. 잠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나서기 까지, 방문, 화장실문, 옷장문, 서랍문 등을 여닫는다. 차량과 지하철과 엘리베이터의 문, 그리고 회사의 문을 통과해야 일터에 도착할 수 있다. 오늘 아침 세어보니 20여 개의 문을 거친 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루에 여닫는 문은 줄잡아 60여 개, 호텔 식당에서 저녁 약속이 있던지, 음악회장의 공연이라도 볼라치면 10개 정도가 추가된다. 예외적으로 방안에만 은둔하는 ‘오타쿠’나 ‘방콕’ 족은 하루 내내 자기 방문과 화장실 문 정도만 여닫을 것이다. 건강한 일상을 살아갈수록 문을 여닫는 횟수는 많아지고, 교제의 폭이 넓을수록 새롭게 만나는 문의 개수가 많아진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은 문과 함께 시작하고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문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은 열기 위해 있을까, 닫기 위해 존재할까? “무슨 쓸데없는 질문이야, 문이란 여닫는 거지”라고 답한다면 문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출세를 위해 좋은 직장을 원하는 젊은이에게 ‘취업문’이란 닫혀있는 거지만, ‘등용문’은 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사찰의 일주문은 늘 열려있어서 문짝이 필요 없지만, 감옥의 문은 늘 닫혀있어서 육중한 문짝이 필요하다. 옛 궁궐에는 이문(二門)이라는 특별한 문이 있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문을 붙여서 만든 한 쌍의 문이다. 큰 문은 왕족들이 다니는 곳으로 대부분 닫혀있지만, 작은 문은 시녀들의 문으로 늘 열려있다. 그래서 큰 문에는 견고한 나무문짝을 달지만, 작은 문에는 천으로 만든 휘장을 달았다. 열고 닫음이라는 문의 양면성을 분리해 개별화한 철학적인 문이다.

문에도 앞과 뒤가 있을까? 있다. 문이란 두 개의 다른 세계를 구획하는 경계이다. 집의 대문은 가족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살벌한 바깥 세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대문의 안쪽은 가족들의 것이지만, 바깥쪽은 세상의 것이다. 따라서 문의 안쪽과 바깥쪽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한옥의 대문을 생각해보자. 안쪽은 띳장과 빗장을 달아 아기자기한 모습이지만, 바깥쪽은 문고리만 덩그러니 달린 얼굴이다. 그러나 아파트의 현관문은 안팎이 똑같다. 안쪽까지 철판을 붙인 차갑고 무표정한 표정이다. 전국 1,000만 채가 넘는 무수한 아파트의 현관문은 천편일률, 공장제 방화문이다. 안팎이 똑같으니 어느 쪽을 보호하겠다는 건지, 참 개념 없는 문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만나는 문들이 이처럼 많은 물음들을 던진다. 건축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문은 가장 복합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담이나 벽과 같이 굳건한 경계를 둘러 건축 공간을 만든다. 경계는 안과 밖을 구획하며, 내부와 외부를 구별한다. 그러나 경계만 있으면 죽어있는 공간이 된다. 건축 공간에는 필히 통로가 필요하다. 집안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 학교나 직장이나 식당이나 백화점으로 가는 통로는 곧 동네와 도시의 길이다. 통로가 없는 공간은 싱크홀이나 수용소와 같이 닫힌 암흑의 공간이다.

문은 바로 경계와 통로의 접점에 놓인다. 문은 닫으면 경계가 되고, 열면 통로가 된다. 특별한 문도 있다. 예를 들어 파리의 개선문이나 서울 올림픽공원의 평화의 문은 시각적 통로에 가깝다. 그래서 두 문은 문짝 없이 늘 열려있다. 반대로 늘 닫혀있는 문은 없다. 세상과 격리를 위한 감옥의 문이라도 출소 때는 활짝 열리기 마련이다. 어떤 문을 만들어야 할까? 문에 연결된 경계와 통로의 성격에 어울리게 만들면 된다. 육중한 성벽에는 견고한 철 대문이 어울리고, 바자울과 같이 가벼운 담장에는 듬성듬성한 사립문이 어울린다.

때마침 문을 주제로 삼은 전시회가 열린다. 한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소통하는 경계, 문(門)’ 전이다. 이 전시회는 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낯익은 것들이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질 때, 당연한 것들에 갑자기 의문이 생길 때 그 때가 바로 생각의 시작점이고 철학의 출발점이다. 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것은 집을 다시 생각하고 삶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삶의 질을 더 높게 바꾸고 싶은가? 그러면 삶의 자리인 집을 바꾸고, 집의 얼굴인 문을 바꾸자.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ㆍ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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