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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가 곧 런던을 제치고 유럽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를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했던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시장의 예상을 단칼에 뒤집는 런던 시장의 인터뷰 기사가 폴란드 신문에 실렸다.

인터뷰 서두에서 금융 중심을 향한 프랑크푸르트의 약진을 한껏 추켜세운 후, 그가 여유롭게 던진 질문은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혹시 프랑크푸르트시가 후원하거나 운영하는 오케스트라, 오페라, 연극, 미술관, 박물관, 뮤지컬 등등에서 '바로 이것이다' 할 만한 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금융 비즈니스가 은행 사무실에서만이 아니라 콘서트홀이나 오페라하우스, 혹은 박물관의 전시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한, 프랑크푸르트가 런던을 제치고 새로운 금융의 중심지가 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런던 시장이 던진 문화적 화두는 기업과 은행 등 사적 영역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 같은 공적 영역에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회의는 춤춘다"는 명구를 남긴 비엔나 회의를 비롯해서 공식 회담장 밖의 외교와 관련된 많은 일화들이 해당 국가들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해주는 지표로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통령의 국빈 방문에 따라가는 문화 프로그램이 자연 궁금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에 앞서 파리를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때의 일이다. 노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앞두고 문화 프로그램의 내용을 사전 조율하는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 보좌진과 프랑스 외교관들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갈등의 핵심은 이렇다. 프랑스인들의 문화적 취향을 고려한 프랑스 외교가의 지한파들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상영을 적극 주장한 데 비해, 노무현 정권의 참모진에서는 한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부채춤' 공연을 고집했다. 결과적으로는 '부채춤'이 '올드보이'를 이겼다는 게 프랑스 소식통의 전언이다.

그 승리의 대가가 프랑스 관중의 무료함이었다니, 부채춤의 승리는 피루스의 승리였던 셈이다. 그런데 프랑스 내 지인들에 따르면, 지금 프랑스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의 공식적인 문화 프로그램도 노무현 대통령 방불 당시와 그리 큰 차이는 없는 모양이다. 내가 '올드보이' 편인 것은 분명하지만, '부채춤'이나 '한류'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인식의 부박함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원작이 일본 만화라는 사실을 불편해하면서도 일본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식민지 조선을 여성화시킨 '한(恨)'과 같은 상징 기호들을 한국적 정서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문화적 문맹 같은 것. '한'이 조선 문화의 상징이 된 것은 식민지 시기 조선을 사랑한 오리엔탈리스트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서였다.

부채춤은 더 현대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전통'무용 부채춤은 1954년 11월 26일 시공관 무대에서 김백봉의 창작 '독무'로 태어났다. 60년이 채 못 되는 역사를 가진 셈이다. 그나마도 리틀엔젤스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군무' 형태의 부채춤은 1968년 10월 멕시코 올림픽의 세계민속예술대전에서 처음 선보였다는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지 시대 최승희까지도 부채춤의 기원을 끌어올릴 수 있겠다. 십 수 년 전, 인도네시아의 남방 불교나 서남아시아의 무용을 연상케 하는 최승희의 '신라 춤' 영상 자료를 처음 보았을 때 충격은 아직도 선연하다. 세계 순회공연을 성황리에 마치는 등 제국의 중심부에서 최승희가 누린 인기는 조선의 '전통 춤' 덕이기보다는 제국의 남성 지식인들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대해서 가진 판타지에 잘 맞는 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의 정조나 '부채춤'처럼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박제화된 전통에서 한국 문화의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은 딱하기만 하다. 문화란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이 웃고 울고 사랑하고 싸우면서 삶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유통하는 고투의 흔적인 것이다. 한류의 전도사들이 "필요하다면 호류지를 부숴버리고 기차역을 만드는 것이 더 좋다"던 일본의 무뢰파 작가 사카구치 안고의 위악을 한번쯤 곱씹어보았으면 한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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