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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과목을 대입 수능시험의 필수과목으로 하자는 정부 방침이 발표됐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 이유라는 게 설득력도 없고, 타당치도 않다.

금세기 들어 동아시아 차원에서 '국사'가 크게 쟁점이 된 것은 2001년이었다. 일본 우익이 만든 후쇼사판 '새역사교과서'가 문부성의 검인정을 통과한 직후였다. 교과서 채택율은 비록 0.1%도 안 됐지만, 식민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공식적으로 가르치겠다니 국제적인 정치문제로 비화할 만도 했다.

'새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일본의 대표적 보수 언론 '산케이 신문'은 그 와중에 동아시아 3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분석 기사들을 연재했다. 한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도 분석되었는데, 이에 대한 '산케이 신문'의 시선은 한 마디로 부럽다는 것이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하고 '자기 고유의 역사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한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의 그 서슴없는 자민족 중심주의야말로 일본의 '새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는 논조였다. 이 기사는 왜 동아시아의 역사 논쟁이 '진실과 거짓' 게임이기보다는 인식론의 문제임을 잘 드러내준다. 역사적 진실은 발견되기보다는 구성되는 것이다.

'국사' 패러다임의 자민족 중심주의가 과거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로 작동하는 한,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실제로 일본과 한국의 '국사'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시켜주는 적대적 공범관계를 만들어 왔다. '새역사교과서' 파동의 가장 큰 수혜자는 자기 강화의 기제를 얻은 한국의 '국사'이며, 그렇게 해서 다시 강화된 한국의 자민족 중심주의는 다시 일본 우익의 혐한 민족주의를 정당화한다. '국사' 교육의 강화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것이다.

한편 '국사' 교육 강화가 불러 올 폐단은 국내의 정치 지형에서는 더 심각하다. 제 2, 제 3의 이석기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기준이 '자주'라는 해괴한 논리로 무장한 남한 주사파의 정신적 자양분은 고교 시절부터 민족이 역사의 주체이자 지존이라고 가르쳐 온 이데올로기로서의 '국사'였다.

유신체제가 '한국적 민주주의'로 자신을 정당화할 때, '국사'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이었다. 민족이 지고의 가치라고 교육받은 남한의 청년 학생들이 친일이냐 반일이냐 혹은 외세냐 자주냐는 식의 단세포적인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주와 민족주체성을 강조한 박정희 정권의 '국사' 교육이 결국 '친일'이라는 부메랑으로 스스로를 겨눈 자살 공격이 되고, 민족적 열혈 청년들을 주체사상으로 이끄는 길잡이였던 것이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남한의 주사파는 유신체제의 사상적 모범생이자 정치적 사생아였다. 민족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민족주의의 논리적 종점에서 주체사상을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북한의 상고사 해석이 이른바 '재야사학'이라 불리는 남한의 극우적 민족주의 역사학과 일치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 국사 교과서의 좌·우 논란이 싱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사 수능 필수 방침은 모범 청년들일수록 더 열렬한 주사파로 만든 박정희 정권의 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필요한 것은 황사나 후쿠시마 원전 등 국경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트랜스내셔널한 역사적 지평인 것이다. 우선은 국경에 갇혀 있는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볼 일이다.

국사 공부 그만 하고, 이제 역사 공부 합시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ㆍ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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